제      목: ‘관습헌법’이 쓸고 간 자리
이      름: 퍼오미
작성일자: 2004.11.09 - 00:22

 
‘관습헌법’이 쓸고 간 자리

헌법재판소가 큰일을 냈다. 행정수도의 이전을 목적으로 국회가 제정한 법률이 헌법에 위반되므로 무효라는 것이다. 서울이 대한민국의 수도라는 것은 비록 헌법전에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대한민국 국민 누구도 의심치 않는 ‘관습헌법’이라는 논리다. 관습헌법도 엄연한 헌법이므로 헌법개정절차를 거치지 않고는 수도를 이전하지 못한다는 선언이다. 8대 1이라는 압도적인 표결이었던 만큼 정면으로 시비 걸기도 어렵다. 민주공화국의 국체를 표방한 대한‘민국’의 헌법에 왕조시대의 전범이었던 경국대전이 어떤 지위를 차지하는지 논증도 없이 마구잡이로 고전에 기댔다. 보통의 판결과 달리 결론을 먼저 내리고 이유를 동원한 느낌이다. 하기야 헌법재판이 실무재판이 아니라 정책재판이라면 못할 바도 아니다. 헌재가 내린 판결의 지혜나 법리의온당성에 대해서는 구구한 평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국무총리의 입을 빌은 대통령의 평가대로 그 누구도 헌법재판소 결정의 법적 효력을 부정할 수가 없다.



<비로소 헌법의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정치적으로 노대통령에게 불리한 결정만은 아니다. 당초 이 사업은 면밀한 검토 없이 표를 얻기 위해 남발한 즉흥적 선거공약의 하나에 불과했다. 막말로 잊어버려도 그만이었다. 이를 추진한 것은 중부권 유권자에 대한 신의보다는 정치적 이해에 기초한 것이다. 무릇 모든 정치가 그렇지 아니한가? 물론 ‘국토의 균형발전’이라는 이 정
부의 근본철학과 정책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초부터 이 사업은 무리라는 중론이었다.
정치적, 정서적 문제를 제쳐두고서라도 소요예산의 규모가 엄청났다. 야당의 반대에 대해 대통령은 시종일관 강경노선을 견지했다. 그의 장기인 ‘맞짱정치’도 정도를 넘어섰다. 행여 대통령자신도 추진하기에 무리한 사업임을 알고서 적당한 순간에 물러설 핑계를 찾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처럼 강하에 야당을 몰아 부친 것도 수도 이전의 공약을 이행하지 못한 책임을 야당의
탓으로 돌리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뜻밖에도 헌재가 그 일을 자원해서 맡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결과적으로 대통령은 정치적 부담은 덜었고 충청권 유권자의 정서적 결속은 더욱 강화되지 않았나. 더더구나 내년에 물러날 헌법재판관과 대법관의 인사에 대통령이 주도권을 잡을 정당한 명분도 생겼다. 그야말로 일석다조의 수확이다.

그러나 이렇듯 복잡한 정치적 함의는 접어두자. 또한 이 판결이 장기적으로 한국 헌정사에 어떤 좌표를 가질 것인가, 속단하지 말자. 지금은 한 가지 사실만 유념하자. 이제는 비로소 헌법의 시대가 열렸다는 사실을. 이제는 누구도 나라의 힘을 독점할 수 없는 시대가 왔다는 사실을. 이제는 대통령도, 국회도, 그리고 사법부도, 그 누구도 절대 권력을 휘두를 수 없다.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의 헌법은 엄연한 삼권분립의 원칙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십 년 동안 대통령이 권력을 좌지우지하다시피 했다. 이제는 이러한 ‘제왕적 대통령’의 지위가 무너진 것이다. 국회가 헌법상의 권한을 내세워 대통령을 탄핵했다. 이번에는 헌법재판소가 헌법에 의지하여 대통령과 국회에 제동을 걸었다. 개개 사건의 옳고 그름을 떠나 권력의 분산은 장기적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수많은 민주주의 싹들이 움틀 것>

대통령, 국회, 사법부 모든 국가기관의 중심에 헌법이 있다. 이제 헌법은 모든 국가기관과 국민모두가 경배해야 할 경전이다. 헌법은 시민종교(civil religion)라는 말이 있다. 종교가 최고의 권위에서 개인의 신조로 자리바꿈한 세속국가에서는 나라의 최고규범은 헌법 이외에 있을 수가 없다.
헌법을 손으로 쓰다듬고 입김으로 애무하는 가운데 나라 사랑과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깊어진다. ‘관습헌법’이 쓸고 간 자리는 얼핏 황량해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거친 지표를 들치고 태양을 향해 손을 내뻗을 준비를 하는 수많은 민주주의의 싹들이 기다리고 있다.

 

글쓴이 / 안경환
· 서울대 법대 교수
· 한국 헌법학회장
· 前 서울대 법대 학장
· 저  서 <미국법의 이론적 조명>
           <그래도 희망은 버릴 수 없다>
           <반대의 자유> <양심적 병역거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