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명인 - 연극배우 박정자
(1994)
연극배우 박정자, 태어나기도 전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저자거리에서의 남사당 공연모습을 '태교'로 배웠다. 묘령의 나이에 극단 <신협>에 들어가 나중에 명영화 감독이 된 오빠(박장호 감독) 덕분에 코흘리개 일곱 살 시절부터 김동원, 이해랑, 최은희 등 당대 최고의 배우가 공연하는 연극을 무시로 보았다. 그리고 대학 2학년 시절부터 32년의 세월동안 연극 무대에 섰으며 본격 무대에 선 것으로 따진다면 28년이 되었다. 그로부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대머리 여가수>, <위기의 여자>, <굿나잇 마더>,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신의 아그네스>, <내사랑 히로시마>, <햄릿>, <그 자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무녀도>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주옥같은 작품으로 조로(早老)에 쉬이 늙어버리는 우리 시대를 거부하고 있다.
포화가 작열하는 느낌으로 관객에게 육박하는 박정자
박정자가 우리 앞에 변신으로 스스로를 토해놓는 현장인 노래하는 모노드라마 <11월의 왈츠>무대를 찾는다.
"그냥, 그 사람. 내 입가에 묻은 맥주거품을 닦아줬어. 나한테 그거면 돼.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사는 건 왜 이렇게 씁쓸하고 쓸쓸한 걸까…. 왜 그리워하는 건 내쪽이어야만 돼. 왜 괴로워하는 건 내쪽이어야만 돼. 이건 불공평해. 아니야, 그렇지만 그냥 그렇게는 가지마…."
강한 개성, 독특한 분위기로 근엄한 수녀원장, 괴퍅스런 시어머니 역 등 노역과 악역의 이미지로만 떠오르는 그이가 파격적인 모습으로 변한 채 무대 위에 있다. 저물어가는 인생의 낙조를 온몸으로 항거하는 중년의 여인이 그곳에 있다. 세월의 관성에 어느덧 지친, 그러나 아직 팽팽한 삶에의 동경으로 무장한 50대의 한 여인이 그곳에 있다. 서늘한 허무와 당당한 섹시함을 함께 지닌 불가사의한 모습으로.
그이가 바로 <11월의 왈츠>에서의 박정자다. 그녀에게서 저런 사랑이야기가 가능할 것인가를 차마 생각해보지 않았을 관객들에게 박정자는 거의 신들린 모습으로 압도한다.
한숨 소리, 훌쩍이는 소리, 그 소리마저 극도로 억제하는 숨막히는 고요. 그리고 피날레와 함께 터져 나오는 박수소리.
앙코르를 외치는 소리. 관객들은 또한번 그녀로부터의 질식에서 해방되면서 '역시 박정자'임을 확인하고 안도한다. 그녀는 우리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은 것이다. 객석의 90%는 여성관객이고 그들은 어림짐작으로 보아 대부분 중년층이다. 그들은 박정자의 몸짓과 대사에 일희일비하며 대리만족, 자기동일시, 감정이입으로 연극에 흠뻑 빠져 들어있다. 적어도 이것만으로도 그녀의 이번 공연은 환상적인 성황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흔히 여자나이 오십이면 여자로서의 인생이 다한 것처럼 여기고들 있죠. 그렇게 인생이 끝났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같은 연배의 여성들에게 이 작품을 보이고 싶었어요. 그들에게 위로가 되고 용기를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제 스스로에게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공연을 본 여성들이 '어떻게 그렇게 당당해 보이나 어떻게 그렇게(그 나이에) 섹시해 보이냐'고 말해올 때 기쁨을 느낍니다. 솔직히 말하면 기대이상이에요."
열화와 같은 관객들의 호응에 힘입어 이미 지난 10월말부터 장기공연에 들어가 있는 <11월의 왈츠>. 이 작품이 그의 대표작 반열에 오를 것인지는 좀더 두고봐야 하겠지만 이 작품을 통해서 배우 박정자가 갖고 있는 개성적인 모습의 원형을 파악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우선, 변신을 시도하는 끝없는 노력. 어느 연기자라고 변신을 꿈꾸지 않을까. 그러나 "배우는 모든 것을 잘하는 게 중요하며 좋은 연기는 연기자의 매우 여러 가지 모습을 필요로 한다. 매일 똑같은 공연을 하는 정기공연조차도 나는 늘 새롭게 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객석에는 항상 새로운 관객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타성에 빠져 습관적인 연기를 하는 것은 곧 배우의 무념을 뜻한다. 그땐 연극을 그만둬야 한다."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그의 변신은 더욱 확실하게 느껴진다.
<11월의 왈츠>에서도 그는 30년 무대인생에서 처음으로 타는 듯한 빛깔의 붉은 의상을 입고서, TV 노래방 프로그램이 아닌 극중에서의 장치를 통해 그의 천부적 노래솜씨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노역(老役)으로서가 아닌 자기 나이 그대로의 심리로 당당히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다.
연극운동을 자처하는 치열한 배우정신
다음으로 무대 위에서의 치열함이다. 극중에서 마지막 노래인 <립스틱 짙게 바르고>를 부른 직후 그이는 매우 지쳐 있음을 얼핏 느낄 수 있다. 그런 채로 관객들의 박수에 답해 앵콜송을 두 곡씩 부른다.
"저는 무대 위에 찌꺼기를 남겨 놓지 않아요. 혼신의 힘을 다해 공연하지, 다음 공연을 위해 에너지를 따로 남겨 두거나 하지 않습니다. 무대 위에서의 공연은 전투와 같습니다. 연극은 NG가 없죠. 긴장의 연속입니다. 끝날 때까지 잠시도 한눈 팔 수 없어요. 무대 위에 던져지면 피투성이가 되는 느낌입니다. 그러면서도 장기공연 때엔 끊임없이 스스로를 부추기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무대 위에서 그가 보이는 치열함의 극치로 사람들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에서 첫아들을 품은 만삭의 몸으로 무대를 지켰다든지, <흐르지 않는 강의 전설>때엔 둘째 딸의 산월이었다든지 하는 그의 일화를 떠올리며 혀를 내두른다. 연극배우 박정자에게서 연상되는 완강함이나 엄숙함의 이미지라는 것도 극중 배역탓 이전에 연극에 임하는 그의 자세에서 오는 것은 아닐는지. 이런 것들로 그는 쉽사리 규정되지 않는 존재가 된다.
극작가 이충걸은 박정자를 말하며 '머리카락을 휘날리게 하는 에너지, 튕겨져버릴 것 같은 카리스마, 흔들 의자에 앉아있는 어머니의 옆모습, 저음으로 말하는 통렬한 부드러움, 그저 고통스러운 모성, 소년같은 중성 이미지, 모호한 에로티즘….'등으로 묘사하면서도 그 문장을 끝내 마치지 못한다. 그리고는 '하나의 진실에 대해 그렇게 많은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할 뿐이었던 것이다.
<11월의 왈츠>공연 막간에 만난 '우리시대의 명배우' 박정자 씨. 이제 96년이면 기성 연극무대에 선 지 30년이 된다. <위기의 여자>이후 비로소(?) 극중 나이와 실제 나이가 비슷해져 본연의 모습으로 과장없는 '제나이 연극'을 하게 됐다.
앞으로 그는 가장 원초적인 우리의 삶. 예컨대 남편, 자식과 같은 가정의 문제, 친구나 남녀의 문제를 확대해서 들여다 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관객의 뜨거운 박수와 환호를 받을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임을 거침없이 말하면서 "이 정도면 이제 나를 주장할 때도 된 것 같다."고 이즈음을 정리한다. 그리고 덧붙여 "전생에 뭐였는지 모르지만 다시 태어나도 연극을 하겠다."고 당당히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신들린 광대 30년의 결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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