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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정길화
Subject   멕시코 이민 100주년 세미나
멕시코 이민 100주년 세미나

1. 멕시코 이민 후손의 현황과 정체성

 지난 2005년 2월 20일, 27일 문화방송에서는 한국인 멕시코 이민 100주년 기념 특집 다큐멘터리 3부작을 방영했다. 이 프로그램은 3월 2일, 3일 그리고 5월 12일, 13일 등 모두 세 차례 방영되었고 멕시코에서는 1부로 간추린 프로그램(‘코레아노의 노래’)이 서반아어판으로 번역되어 공영방송 카날 온세(채널 11)를 통하여 역시 5월 20일, 21일 두 차례 방영되었다. 이 프로그램을 위하여 본인은 지난해 11월, 12월 멕시코, 쿠바, 미국 일대를 통산 45일 여 현지 취재를 하였다. 필자가 이민사나 이민 문제에 대한 전문가는 아니지만 방송다큐멘터리스트로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프로그램을 제작해 나름대로의 성과를 올린 것에 보람을 느낀다. 본고는 사안에 관한 본격 논문이라기보다 다큐멘터리스트로서 현장에서 보고 느낀 것을 정리한 제작 후기 정도로 봐 주시면 감사하겠다. 주장하고 논증할 내용이 아니고 목격하고 관찰한 바를 토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4만 여의 멕시코 에네껜 후손

 현재 멕시코 일대에 살고 있는 에네껜 한인 이민 후손은 3- 4 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추산이라는 말에서 엿볼 수 있듯 정확한 통계는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1905년 1,033명의 한인들(수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으나 본고는 1,033명설을 채택한다)이 기만적인 계약이민으로 멕시코에 온 이후 바로 그해 조국은 을사늑약을 맞았고 곧 1910년의 한일 강제병합이 있었다. 그로부터 식민지, 해방, 분단, 전쟁.....등.. 현대사의 격동 속에서 본국과 완전히 단절된 채 100년을 흘러온 세월이고 보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와 달리 멕시코에 자발적, 계획적 이민을 실시한 일본의 경우는 일본계 멕시코인들의 거의 ‘족보’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1997년에 있은 일본의 멕시코 이민 100주년 기념시 일본 이민자의 명부(名簿)를 대부분 복원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2차대전 종전 후 극히 일부가 한국으로 돌아왔다(20가구 70명, 이자경 ‘한국인 멕시코 이민사’)고는 하지만 대부분 조국과 유리된 채로 다시 60년을 살아왔다. 그러는 사이 에네껜 한인 후손들은 생존과 생활을 위해 멕시코인과 멕시코문화와 동화되어야 했다. 조국이 ‘역사적 기민(棄民)’이나 다를 바 없는 그들의 존재를 비로소 안 것은 1960년대 이후라고 하겠으나 그때의 한국에는 여력이 없었다. 이후 연극, 소설, 영화 등을 통해 그들의 존재가 점차로 알려졌다. 이후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룬 조국 대한민국이 비로소 여유를 가졌는지 에네껜 후손들을 본격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최근 방송에서 수 차례 현지 르포로 에네껜 이민들의 간난신고(艱難辛苦)와 영고성쇠(榮枯盛衰)를 그렸다. 그 결과 이제 유카탄 반도 한인들의 모습은 우리 국민들에게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게 되었다. 일본의 재일동포, 중국의 조선족(재중동포), 미국 이민의 원조격인 하와이 한인, 사할린과 타시켄트의 카레이스키에 이어 멕시코 쿠바 일대의 에네껜 한인 후손은 우리 민족이 근현대사에서 겪은 장구한 시련과 유랑을 보여주는 극명한 존재이기도 하다.

유카탄에서 멕시코 전역으로

  멕시코 유카탄 반도 메리다 근동에는 폐허가 되다시피 한 에네켄 농장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이곳에 일부 한인 후손들이 살고 있다. 레판, 사낙타, 착마이... 등의 농장이다. 물론 지금은 에네껜 재배는 별로 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피폐한 농장 주변에서 거주하며 막노동이나 품팔이를 하면서 겨우 살고 있다. 자녀들의 교육 실태도 열악하다. 이들의 거주지는 마야 원주민 전통 가옥인 파하(Paja)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집 앞과 뒤에 문이 나있는 파하는 섭씨 40도를 넘는 유카탄반도의 고온다습 지대에서 바람이 잘 통하게 지어진 가옥이다. 옛날에는 바닥은 보통 흙바닥으로 돼 있었다. 요즘은 시멘트 바닥으로 된 집도 있다. 이렇게 흙바닥 혹은 시멘트 바닥으로 된 것은 침상 대신 그물침대인 하마카(jamaca 해먹)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하는 현대적인 주거시설과 거리가 있다. 기본적으로 우리의 초가집과 같은 형식의 농촌지역 거주형태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렇듯이 첫 이민 정착지였던 메리다 일대에 거주하는 5천여 후손들의 상당수는 현재 이 지역 현지인들과 마찬가지로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다. 물론 이들 메리다 농촌 지역 후손들의 현 모습을 전체 에네껜 한인 이민자들의 모습으로 볼 수는 없다. 멕시코 혁명, 에네껜 산업의 붕괴 등 지난 100년간의 치열한 멕시코 역사를 건너오면서 한인들은 수차에 걸쳐 살 길을 찾아 유랑을 해야 했다. 1920년대 이래 그들은 멕시코 전역으로 흩어졌다. 참페체, 킨타나 로, 체투말, 코앗사코알코스 등 메리다에서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멕시코시티 등 대도시 지역으로 그리고 멀리 북부 멕시코와 미국의 접경지대인 티후아나, 시우닷 후아레스까지....
 그런데 메리다에 남은 이들과 도시지역, 상공업 지역으로 떠난 이들과 생활 수준은 많이 다르다. 현재의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기회의 땅을 떠나간 사람들이 치열한 생존투쟁 결과 오히려 좋은 결과를 맞은 측면도 있다. 티후아나에서 목회 활동을 하는 한국인 이형균 목사는 자신이 직접 답사하고 조사한 바로 한인 후손들의 교육수준과 생활수준은 멕시코 사회에서 상위 18%안에 든다고 한다.(이 수치는 멕시코 전국적 상황이 아닌 티후아나, 엔세나다, 시우닷 후아레스 등 북부 상공업 지역을 중심으로 한 결과로 보인다.)
 한편 현재 멕시코에 살고 있는 많은 에네껜 후손들은 나름대로 멕시코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 의사, 변호사, 교수, 고위관리, 회계사, 목사, 사업가 등 각종 전문분야에 진출해 있다. 고인 중에는 발명가나 성악가로 오페라 프리마 돈나를 한 이도 있다. 또 현역은 아니지만 프로 레슬러를 한 이도 있다. 메리다 지역 한인후손회장을 맡고 있는 한인 3세 울리세스 박은 자동차 매연검사소를 운영하는 지역 유지다. 멕시코시티 지역 한인 후손회장인 다비드 김 공은 공인회계사로 현재 멕시코 진출 한국 기업들의 회계 업무를 적극 돕고 있다.  

한인 정체성 문제는 이들의 숙제

   이제 후손들 가운데 3∼4세로 내려오면서 진행된 현지화(혼혈)로 순수 한국인 혈통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멕시코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유카탄 반도 메리다 지역에서 10년째 한인 후손들을 돕고 있는 한국인 조남환 목사는 "한국인 피가 적더라도 자신들의 정체성 속에 그것이 살아 있다면 한인 후손으로 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서울 올림픽, 한일 월드컵 등 굵직한 국제 행사와 한국 경제의 발전에 따른 유수한 기업의 멕시코 진출 등으로 후손들은 비로소 한국을 인식하고 점차 한인 혈통에 대한 자부심과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한인 4, 5세대에 해당하는 신세대들은 굳이 한인이냐 멕시코인이냐를 따지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두 그룹 모두에 속해 있다는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부류도 있다고 한다. 문제는 이들은 한국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당연한 결과지만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것도 쉽지 않다. 서동수 전 한인회장은 “한인 후손들은 그야말로 전부다 충실한 멕시코 시민이다. 그건 시민으로서 말하자면 공적인 시민으로서의 일이고, 이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자기 피가 한국피다. 한국 피는 여기 사람들 피하고 조금 다르다 하는 것에 긍지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MBC 다큐멘터리 <에네껜> 제 3부 ‘비바 메히꼬레아나’편에 출연한 세이디의 경우 한인 후손으로서 한국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국제교육진흥원 지원으로 한국에서 9개월간 한글교육을 받았던 세이디 올센 아길라는 “멕시코에서는 동양계라고 놀림을 받았는데 한국에 가니 한국 사람들은 나를 외국인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교육을 마치고 다시 멕시코에 오니 사람들은 공항에서부터 ‘너 멕시코 사람 아니지..?’ 라고 해서 묘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멕시코인과의 급속한 혼혈에 한국어까지 잊은 에네껜 후손들로서는 이러한 정체성의 혼란은 불가피한 일인지 모른다.
  다만 한국 음식문화는 여전히 한인 후손을 연결하는 고리중의 하나다. 후손들 가운데 한국말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도 한국 음식문화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지금도 많은 후손들이 김치, 고추장, 된장, 콩나물, 만두, 미역국, 지짐(부침개)... 등을 알고 있고 먹을 줄 안다. 밥 또한 멕시코 식이 아닌 한국식으로 지어 먹을 줄 안다. 음식문화의 습관성과 중독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에네껜 농장생활 초기에 고추, 마늘, 된장, 간장을 구하지 못해 고생했던 한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현지에서 구한 재료로 김치를 담그고 장조림, 만두, 국수를 만들었다. 지금도 한인 후손들은 삼일절 등 기념일에 모여 한국 음식을 만든다. 멕시코시티 한인회장 다비드 김공의 딸 위누엔은 김밥이며 만둣국, 국수, 부침개 등 한국음식을 곧잘 만들고 먹는다. MBC 특집 다큐멘터리 <에네껜>에서 한국음식을 만들어 먹는 한인후손들은 전편에 걸쳐 많이 소개된 장면 중의 하나다. 지난해 11월 16일 한국 해군 순항훈련 함대가 당시 영국 화물선  일포드호가 처음 도착했던 멕시코 남서부 살리나크루스 항에 입항했다. 당시 이곳에 모였던 한인 후손 200여 명은 한국에서 선박뿐만 아니라 자동차와 세계 최고 수준의 전자제품을 만든다는 얘기를 듣고 크게 감격했다.
  한인 후손은 멕시코 사회에서 한국-멕시코가 적어도 한 세기 이상의 교류를 가졌음을 보여주는 산 증인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양국 교류와 협력의 주요한 교두보가 될 수 있다. 한국이 라틴 아메리카로 나아갈 때 이들이 긍정적 의미로 첨병(尖兵) 역할을 할 것을 기대한다. 1960년대 후반 스페인어 유학생으로 멕시코에 와 한인 후손 여성과 결혼했던 장기철 전 한인회장은 “우리가 앞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이 사람들이 한국 문화에 대해 잊지 않도록 그것만 지원해주면 한인 후손들이 앞으로 유태인이나 아랍인들 식으로 계속 모국에 대한, 자기 조상의 모국에 대한 그런 마음은 꼭 지킬 거라고 생각한다.” 고 말하고 있다. 이와 관련 이번 2005년 한국인 멕시코 이민 100주년 기념 사업에서 한국 정부가 메리다에 병원을 지어주고 한인회관을 기념관으로 복원하는 등의 사업은 향후 큰 성과로 나타날 것이 기대된다. 이에 대해 메리다 조남환 목사는 “한국 정부에서 복원할 수 있도록 협조해 주어서 이 새로운 역사를 여기서부터 써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냥 단지 단절된 역사가 아니고 이제 이 역사가 이어진다고 하는 중요한 의미도 담겨 있다.” 고 말하고 있다. 이제 100주년이 끝났다고 해서 일회성 사업으로 그치지 말고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 확대할 수 있는 장기적인 사업을 구상해야 할 것이다.  


2. 쿠바 이민 84년, ‘쿠바코레아노’의 현황과 과제

700 여 명의 쿠바 코레아노

  한편 멕시코 이민이 도착한지 16년 뒤인 1921년 288명의 한인들이 멕시코에서 쿠바로 제2의 이민을 떠났다. 쿠바의 사탕수수 경기가 좋다는 소문을 듣고 제 2의 이민을 간 것이다. 그들이 도착한 마나티항에서 지금도 살고 있는 사라 뻬레스 김에 따르면 “그들은 먼저 한국에서 멕시코로, 그리고 멕시코에서 쿠바로 이주하게 됐는데, 그 당시 쿠바에서 잘 살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왔다. 일을 할 때도 넥타이를 매고 한다..., 물을 마시지 않고 우유나 맥주를 마신다는 등 그런 소문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쿠바에 와 돈을 벌어 다시 한국이나 멕시코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과적으로 상투를 잡은 셈이 되었다. 그들이 쿠바에 도착하기 직전인 1920년에 이미 쿠바의 사탕수수 경기는 폭락했다. 결국 그들은 쿠바에 일부 남아 있는 그 지긋지긋한 에네껜 농장으로 다시 가야만 했다. 그야말로 배운 도둑질인 셈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한인들의 끈질긴 생존능력은 다시 발휘된다. 숙련된 에네껜 농사 솜씨로 힘들지만 생활의 기반을 잡아나간 것이다. 공동체를 이루고 교육과 생활을 자급자족했다.
 쿠바 한인 사회는 비교적 빨리 뿌리를 내리는 듯했지만 1959년의 쿠바 혁명은 다른 우여곡절(迂餘曲折)과 고생의 계기였다. 카스트로 혁명정부는 기득권층이나 지주, 자영업자들의 사유재산을 동결하거나 몰수했다. 천신만고 끝에 쿠바 사회의 중산층으로 성장한 한인 상인들에겐 청천벽력이었다. 공산혁명 직후 부르주아로 몰린 일부 한인들은 재산을 빼앗기거나 멕시코, 중남미, 미국 마이애미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이 과정에 한인 사회도 갈라지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카르데나스에 있던 에네껜 농장에서 한인 노동자를 규합해 혁명에 앞장섰던 사람이 있는가 하면, 피그만 전투에서 반혁명군으로 참여한 한인도 있었다(이 한인은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쿠바 혁명은 한편으로는 어렵게 살고 있던 한인들에게 새로운 기회였다. 한인 사회를 괴롭히던 외국인 배척주의와 차별 고용도 사라졌다. 무상교육과 무상배급 제도로 한인들은 쿠바인과 같은 대우를 받으면서 급속히 쿠바 사회로 동화됐다. 현재 750명 남짓한 쿠바 한인 가운데 의사만 16명에 이르고, 20여 명이 엔지니어로 활동한다고 한다. 변호사, 교수 등 지도급 인사로 활동하는 인물도 수십 명에 이른다. 그렇다고 형편이 크게 나아진 것은 아니다. 작금 사회주의 정권하 쿠바의 현실이 열악하기 때문이다.
 쿠바 한인사회 지도자로, 백범 김구가 이끄는 중경의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성금을 모금하기도 했던 임천택(김구의 ‘백범일지’에 뚜렷이 그의 이름이 있다)의 아들로 카스트로와 아바나 법대 동창이기도 했던 헤로니모 임. 그는 혁명 이후 체 게바라가 산업부 장관이던 시절 차관급인 식품청장을 지냈다. 그가 한인 사회에서 말하자면 가장 형편이 나은 편인데 그의 가족은 매달 40달러(약 4만1000원) 남짓한 연금과 얼마 안 되는 배급 쌀로 한 달을 버텨야 한다. 1990년대 초 아바나에 북한 식당 ‘모란봉’이 문을 열었지만 2년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쿠바인들은 한국 음식을 먹지 않았고, 한인들은 한국 음식을 사먹을 돈이 없었다.
 한인들은 1921년 6월 마탄사스에서 대한인국민회 ‘쿠바 지방회’를 설립했고, 마탄사스 주 정부의 인가를 받았다. 국민회는 쿠바에 사는 한인들을 결속하는 토대였다. 이에 대해 쿠바인들도 감탄하고 있다. 한 쿠바인은 “한인들은 쿠바에서 적은 수의 이민으로 시작해 5, 6대를 이어오면서 유전적으로는 25%의 한인 혈통 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예전 조상들이 해왔던 교육을 이어 받으면서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이는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공산정권이 들어선 이후인 1967년 한인회는 공식적으로는 사라졌다. 실질적인 쿠바 한인회장으로 활동하는 헤로니모 임은 “4 년 전 정부에 한인회 재등록 신청을 냈지만 아직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사회주의 국가인 쿠바 정부는 국민들의 사적인 결사(結社)를 환영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친북 성향의 국가인 쿠바로서 한인회의 한국 경도(傾倒)가 반갑지 않을 듯도 하다. 헤로니모 임은 정부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바도 있으며 마침내 지난해 겨울부터 아들 넬슨을 재외동포재단의 지원으로 한국에 보내 한국말을 배우게 하기에 이르렀다. 멕시코 에네껜 한인들이 한국의 멕시코와 중남미 진출에 교두보가 될 수 있다면 쿠바의 한인 후손들은 한국과 쿠바의 교류협력에 주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전령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3. 결어

 100년전 멕시코 이민은 냉정하게 말하면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대한제국 말기에 국제 정세도 모르고 외교권도 제약되었던 시절에 일단의 한인들이 ‘과대광고’에 속아 무심코 응한, 속된 말로 ‘네다바이식 이민’일 수도 있다. ‘약속의 땅’ 묵서가(墨西哥)에 도착한 이들을 기다린 것은 고대광실(高臺廣室)도 금은보화(金銀寶貨)도 아니었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더더욱 아니었다. 있다면 가혹한 노동조건과 열악한 생존환경이 있을 뿐이었다. 기약없는 날과 암울한 조국의 현실이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한민족 특유의 강인한 생존력을 바탕으로 듣도 보도 못한 이국 땅에서 장엄히 유장한 생활의 드라마를 연출하였다. 이들이 특히 감동적인 것은 그 와중에 한국적인 공동체를 실현하였고 후세를 위한 교육을 하였으며 조국을 위한 모금운동을 자발적으로 진행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한마디로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장렬한 개척이민사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은 그뿐 아니라 멕시코에 노동력을 공급하고 지역발전에 기여하였으며, 어떤 지역에서는 어업 활동을 가르치기도 하고 동양 문화의 한 양식을 전수하였다. 어떤 방식으로든 지난 100년간 멕시코 사회 발전에 기여한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두 문화의 아름다운 만남은 오늘에 있어서도 시사점이 많다. 한국이 라틴 아메리카로 나아가려 할 때 에네껜 이민들의 지난 100년사는 소중한 체현(體現)의 사례가 될 것이다.
 이제 지난 100년을 넘어 새로운 100년이 시작된다. 그러한 이즈음, 한국과 멕시코는 상생과 상호 이익의 교류를 본격적으로 출발할 때다. 바로 이 때 지난 100년 동안 에네껜 이민 1,033명과 그들의 후손이 만들어온 역사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개척과 도전의 서사시로 양국민의 가슴속에서 자리매김되어도 결코 지나침이 없다고 생각한다.



필자 정길화

현 MBC 홍보심의국장
1984년 MBC 입사. 시사교양국 프로듀서.
2005년 2월 당시 한국인 멕시코 이민 10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에네껜> 제작.  피디수첩, 인간시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 기획 연출.
방송대상, 한국언론대상, 통일언론상, 한국청년대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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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5.10.02 -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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