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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peomi
Subject   ☞ 원문
‘피디의 날’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피디연합회 창립 20주년을 맞는 올해, 기념사업의 하나로 ‘피디의 날’ 제정을 제안해 본 바 있다. 국민의 알 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신장시키는 중추이자 방송문화 창달의 핵심으로서 피디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위상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자리매김해 보자는 취지다. 물론 한국기자협회가 지난 해 제1회 ‘기자의 날’ 행사를 하고 ‘기자의 혼’상을 제정, 운영하는 것을 보면서 영향을 받았음을 부인하지 않겠다. 좋은 일은 벤치마킹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피디연합회도 어느 유서깊은 길일을 피디의 날로 삼아 “개개인의 현재와 미래를 의미있게 가꾸고 채워가기 위해 스스로 기념하는 날”(2006년 ‘기자의 날’에서 고승우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존경하는 선배를 모셔 ‘피디의 혼’상을 드리면 사뭇 뜻있는 일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주지하다시피 우리 언론계에는 이미 ‘신문의 날’과 ‘방송의 날’이 있다. ‘신문의 날’은 한국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의 창간일을 기리는 4월 7일인데, 이 날은 오래전부터 신문협회, 편집인협회, 기자협회 등 3 단체가 공동주최하고 있다. 그럼에도 기자협회가 우정 ‘기자의 날’을 만든 것은 일선 기자보다는 발행인과 편집인, 정부 관계자, 심지어 기업 관계자 일색으로 치우치는 기존 행사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결과로 보인다. 게다가 작금의 언론상황이 신문, 방송, 통신, 인터넷 등으로 다원화되면서 모든 기자들을 통합하는 구심적인 행사의 필요성을 느꼈을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지난해 한국기자협회는 여러 의견을 수렴한 끝에 5월 20일을 ‘기자의 날’로 제정 선포했다. 계기가 된 날은 1980년 5월 20일로 이 날은 기자협회가 계엄과 언론 검열에 반대해 정식으로 제작 거부 운동을 벌인 날이다. 5·18 광주항쟁 발발 당시 이른바 신군부의 압력에 맞선 일선 기자들의 치열한 저항정신을 반영한 취지로 보인다.

‘기자의 날’ 제정을 논의할 때 ‘동아투위’의 기원이 된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일을 기념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도 당연히 있었다고 한다. 엄혹한 유신 치하에서 일단의 동아일보 기자들이 1974년 10월 24일 .-외부간섭배제 .-기관원출입거부 .-언론인 불법연행거부 등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분연히 천명했다. 이는 이듬해 3월 17일의 대량해고 사태 이후 ‘동아투위’로 이어졌다. ‘기자의 날’로 삼아 손색이 없는, 한국언론사에 빛나는 역사다.

그런데 논의 과정에서 “(10.24는) 전 언론사 차원의 운동으로 확산되지 않아 전 언론인들의 기념일로서 다소 미흡한 점이 있다”고 해서 토론 끝에 5월 20일로 정해졌다고 한다. 한국기자협회가 10.24보다 5.20이 ‘기자의 날’로 더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은 미상불 이해가 간다. 전국의 기자들을 아울러야 하는 입장에서 특정 신문 기자들의 엘리트적 운동보다 좀 더 전국적, 대중적, 현장적인 운동의 역사를 택한 것으로 생각된다. 5월 20일은 이 땅의 언론자유를 위한 지난한 투쟁을 선도해온 기자협회의 뼈대와 전통을 웅변하는 날인 것이다.

10.24, 5.20뿐만 아니라 우리 기자들에게는 기념을 하고 범본으로 삼아야 할 만한 날과 사건이 많은 것 같다.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무명회, 철필구락부 사건도 될 수 있고, 일장기 말소사건도 될 수 있다. 해방 후 독재정권기의 언론탄압과 기자들의 저항과 투쟁 사례는 이루 다 열거할 수조차 없이 많다. 발행인은 독재권력과 타협하며 순치되었어도 그래도 기자들의 펜은 살아 있었다. 물론 권언유착, 무슨 장학생의 한심한 역사도 있고 출세지향의 기자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일선기자들의 저류에는 언론자유와 실천을 지향하는 정신이 살아 있었다. 이것이 ‘기자의 날’ 제정으로 나타난 것으로 믿고 싶다. 매체간 무한경쟁 속으로 기자들이 내몰리고 그럴수록 진정한 기자의 혼이 절실한 이 때 기자협회의 ‘기자의 날’ 행사가 시사하는 바는 크다.

다시 ‘피디의 날’로 돌아온다. 피디연합회의 고민이라고 기자협회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작금 방송계는 지상파 방송의 비대칭 규제 틀에서 정체된 광고시장이라는 제한된 파이를 둘러싸고 소모적인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다. 시청자 복지나 문화 창달보다는 세분화, 극화의 와중에 적자생존이 강요되는 정글이다. 그런 가운데 피디연합회는 회원들에게 부단히 피디정신을 설파하고 있다. 이런 마당에서 연합회가 피디들을 아우르고자 할 때 구심적인 공통의 상징이 필요할 것이다. ‘피디의 날’은 그래서 현실적인 당위성을 가진다. 물론 필요성에 대한 회원들의 충분한 공감대, 어떤 날을 선정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선행되어야 한다.

만약 피디연합회가 ‘피디의 날’을 만든다면 어떤 날을 삼을 수 있을까. 우선 떠오르는 것은 ‘단파방송 청취사건’이다. 일제하인 1942년 경성방송국 개성 방송소에서 일하던 일단의 조선인 방송인들이 ‘미국의 소리(VOA)’를 몰래 청취한 것에서 시작된 이 사건은 방송인의 깨어있는 의식과 기개를 보여준 것으로 후배들의 귀감이 된다. 이 사건으로 방송인을 비롯한 200여명이 검거되었고 이인덕 개성방송소장은 출감 이후 고문의 후유증으로 병사하기도 했다. 후배 방송인으로서 숙연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그런데 미시적으로 들여다 보면 피디들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이 시절엔 방송제작 현장이 일종의 ‘발달되지 않은 융합(primitive fusion)’ 단계로 있어 지금과 같은 직종의 잣대를 적용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당시 방송인들이 이심전심으로 가담한 이 사건을 특정 직종이 주도했다 아니다로 따질 일은 분명히 아니다. 어떻든 단파수신 사건이 일경에 발각된 1942년 12월 24일을 ‘피디의 날’로 삼기에는 반지빠르다. 혹여 ‘방송인의 날’을 기린다면 능히 유력한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묻힐 것이 틀림없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이승만 정권 말기 1960년 3.15 부정선거 전후의 부산MBC의 활약상이다. 1959년 4월에 개국한 부산MBC는 당시 부정선거에 저항하는 학생과 시민의 시위를 라디오로 거의 생중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위대의 구호와 함성, 총소리가 그대로 전파를 탔다고 하는데 이로써 한국 상황이 NHK와 AP 통신에 의해 즉각 전세계에 타전되었다고 한다.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 시체가 떠오르기 전에 부산 경남지역에서는 이미 방송이 주도적으로 이승만 독재 타도의 전선을 견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3월 15일을 ‘피디의 날’로 삼기에는 부적절하다. 부산MBC의 활약은 당시 사주인 김지태의 결단에 의한 것이며, 또한 라디오 방송이라는 매체의 위력으로 인한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 더 들 수 있는 것은 이른바 <앵무새> 사건이다. 박정희 정권하인 1964년, 지금은 없어진 동아방송(DBS)에서 <앵무새>라는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있었는데, 6.3 사태 직후 이 프로그램이 정국이 혼란한 국면에서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작가, 담당 피디, 방송부장, 제작과장, 편성과장 등이 구속된 일이 있었다고 한다(<한국언론 바로보기> p.284). <앵무새>라는 프로그램 제목은 시대상황에 대한 역설적이고 자조적인 의미가 아닌가 싶은데 직접 들어보지 못해 잘 알 수 없다. 어떻든 방송프로그램에 의한, 방송프로그램으로 인한 많지 않은 탄압 사례 중의 하나다. 하지만 사건의 규모나 파장 면에서 피디연합회가 ‘피디의 날’로 삼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그 외에는 방송 또는 피디들이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하여 투쟁하거나 희생한 기록은 유감스럽게도 별로 찾을 수 없다.

피디들의 언론운동 구심체인 피디연합회가 만들어진 것은 6월 항쟁 이후인 1987년 9월. 그 이전에 피디들이 현업 현장에서 조직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시대상황에 대응했던 일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는 언론노조가 출범함으로써 현장의 운동과 투쟁은 임의단체인 기자협회나 피디연합회의 손을 떠났다. 피디들은 현업 방송노동자의 이름으로 노조에 참여했고 투쟁했다. 요컨대 기자들이 했던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이나 기자협회가 했던 5.20 제작거부운동과 같은 역사를 지나간 방송과 피디들의 궤적에서는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시대가 변하고 있는데 구태의연하게(?) 권력과의 길항적 관계 속에서만 ‘피디의 날’을 찾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지적도 있을 수 있다. 대중에게 문화적 풍요로움과 함께 꿈과 위안을 주면서 국민통합에 기여하는 방송피디들과 각종 프로그램의 다양한 영역을 감안하여 선정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주장도 충분히 가능하다. 이런 측면에서는 기억에도 선연한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을 시작한 날, 또는 <어머니의 노래>, <광주는 말한다>가 방송된 날, 국민드라마의 반열에 오른 <모래시계>나 <대장금>을 시작한 날, 혹은 진실을 탐사하는 투혼을 보여준 <피디수첩> 황우석- 재검증 편이 방송된 날도 그 기원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무릇 피디는 프로그램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정 프로그램과 연관짓기에는 전국의 방송피디와 모든 장르의 피디들을 아우르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논의는 쳇바퀴로 돌아온다. 피디연합회 창립 20주년 기념사업으로 ‘피디의 날’을 선정할 것인가. 한다면 어떤 날을 삼을 것인가. 그날 우리에게 ‘피디의 혼’상을 느꺼이 모시고 싶은 선배는 있는가.  없다면 우리 피디 사회는 무엇을 반성하고 앞으로 무엇을 지향할 것인가. 그날 그날 프로그램 아이템 기획에 여념이 없고, 매 프로그램의 시청률(청취율)에 일희일비하는 회원 여러분에게 이 주제를 던지며, 이 논의에 회원 여러분의 참여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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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7.02.06 - 22:43
LAST UPDATE: 2007.02.08 -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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