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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사진이 우리의 눈길을 끈다. 한국은행 조순 총재가 '외압'에 의하여 사표를 내고 한국은행을 떠나던 날, 40대쯤은 되어 보이는 한 직원이 큰절을 하며 조순 총재의 앞을 가로막는 장면이다. 신문의 사진 설명에는 친절하게도 그 직원이 울음을 터뜨리며 통곡하였다고 되어 있다.
한국은행 총재 조순, 일찍이 한국경제학의 태두로 군림하였고 부총리를 역임하였으며 '산신령'이라는 애정어린 별명으로 국민들에게도 친근한 인물. 정통 경제학자로서 명망이 높았던 그의 관료로서의 입신은 여의치 않았을까. 부총리로서의 마지막도 그러했고 한국은행 총재로서의 그것도 모양새가 썩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게다가 이번 도중하차의 원인에는 통화가치 안정에 관한 신정부와의 이견 말고도 '괘씸죄'가 적용되었다던가..
지금 필자는 어느 단명한 정부 관료의 관운을 얘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조순 전 총재의 이임식 장면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한 사람의 노(老)방송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다름 아닌 최창봉 전 MBC사장이다. 임기만료전 사표제출→사표수리→후임인사 경질로 이어지는 동일한 수순을 밟고도 왜 그는 이임식도 없이, 그 앞에 꿇어 엎드려 우는 한 사람의 MBC가족도 없이 문화방송을 떠나야 했을까.
조순 전 총재와 최창봉 전 사장을 단선적으로 연결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선임과정도 다르고 재임시의 업무추진성과나 직원들이 그에 대해 갖고 있는 신망도 다르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엄연히 사계에서 존경받는 원로임이 분명하고, 법적으로 보장된 임기가 끝나기 전에 적어도 절차상으로는 '위법'인 과정에 따라 직을 물러났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행직원과 달리 MBC직원들은 비인간적이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최창봉사장의 재임기간이 파업, 해고 등 극심한 노사대립으로 점철되었다는 점에서 노조측이 그의 사퇴를 '방관'했었던 것은 그런 대로 이해가 된다. 아무리 가는 손님(?) 뒷모습이 곱다해도 그런 정서에서 최창봉 전 사장이 퇴임하는 길목에 진달래꽃을 아름 따다 뿌려 드리기는 짜장 어려운 노릇이다.
반면에 최창봉 사장과 명운을 같이하고 이념적인 입장을 일치하였던(혹은 일치하는 것처럼 행동했던) 부류들 중에서도 그가 황망히 이삿짐을 챙겨나갈 때 소매자락을 부여잡고 나서는 이 하나 발견되지 않았던 것은 미상불 흥미로운 대목이다. 조금 비약해서 말하자면 박 대통령 사후 그 많던 '유신의 아들 딸'이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린 것과 비슷한 점이 있다.
이임식 없이 떠난 최사장
그러나 최창봉 사장을 보내는 아름다운 송별연이 없는 까닭은 아무래도 최창봉 사장 자신으로부터 찾아야 할 것 같다. 세상인심은 각박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정직하기도 하다. 그러길래 관뚜껑 닫아보면 그 사람의 진짜 평가를 알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현직 사장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인지상정이고 세상의 철칙이다. 중요한 것은 그 직을 물러났을 때에도 은은하게 후광이 비추어지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상 조순 총재와 최창봉 사장이 정말 다른 것은 따로 있다. 조순 총재가 중앙은행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위해 신명을 바치고 있을 때. 최창봉 사장은 방송의 공정성과 문화방송의 독립성 신장과는 반대의 길로 치달았다는 극단적인 평가마저 나오고 있다.
돌이켜 보면 지난 1989년 2월11일 "여러분의 홀로서기 투쟁의 결과로 구성된 방송문화진흥회에서 사장으로 선임되어 이 자리에 섰다"고 선언하고 "예속과 굴종의 시대를 마감하고 ...방송민주화라는 지상과제를 위해 다함께 노력하자"며 팡파레를 울렸던 최창봉 전 사장의 취임식은 기억에도 선명하다. 이때 그는 "한국리얼리즘의 방송시대를 함께 일구자"고 천명하여 방송가에서는 때아닌 리얼리즘 논쟁마저 일어났다.
당시 최창봉 사장 취임 직후 광주민중항쟁 다큐멘터리 <어머니의 노래>가 방송될 때만해도 그의 방송철학에는 어떤 실체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얼마 못 가서 최창봉사장의 방송리얼리즘론은 쉽사리 그 바닥을 드러낸다. 급변하는 방송환경과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방송사 노사관계에 적절히 대응하기에 그는 너무 노령이었기 때문일까. 급기야 1990년 9월 4일 남북 고위급 회담을 하루 앞두고 빚어졌던 <피디수첩> 불방사태에 이르러 그것은 절정에 달한다. "분단의 논리에서 통일의 논리로 그 인식이 바뀌어져 가고 있는 통일지향적 시대"라고 우리 시대를 규정했던 화려한 취임사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강사장의 3년후는?
그 이후의 행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와 같다. 김평호, 안성일, 두 동지는 해고되고, 드라마 <땅>은 마무리도 맺지 못하고 생매장되었으며 무수한 불공정 보도시비가 이어졌다. 파행적인 노사관계, 방만한 경영, 방송프로그램의 경쟁력 저하 ... 재임기간 4년 동안 있는 MBC의 과오를 모두 최창봉사장에게 책임지울 수는 없다. 그러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권위에 대한 복속과 질서를 강조했던 그에게 당시의 공과를 묻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현시점에서 최창봉 사장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은 시기상조일 수도 있다. 어쩌면 '부관참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순 전 총재의 이임식 장면을 보면서 최창봉 전 사장의 뒷모습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어느 누구 하나가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 아무도 없이" 그는 떠났다. 퇴진하는 사장의 이임식은 이환의 사장 이후로는 지금껏 한번도 없었다는 전통(?)을 계속 유지하면서. 이 전통은 도대체 언제까지 갈 것인가. 결국 이 질문의 종착역은 신임 강성구 사장의 3년후를 향한다.
문화방송노보 1993.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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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ST UPDATE: 2002.11.23 - 1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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