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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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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ject | 나와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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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와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이제는 말한다!
매주 일요밤 11시 30분에 방송되는 MBC 특별기획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2000년 방송분이 이제 막바지다. 지난해 '제주 4·3사건' '여수 14연대 반란' '조봉암과 진보당' '인혁당 사건' '언론통폐합과 언론인 강제해직' '실미도 특수부대' '간첩(?) 이수근' 등 13편을 방송한 데 이어, 올해에는 양민학살을 다룬 '○○사단의 사라진 작전명령서'를 필두로 '일급비밀! 미국의 세균전' '94년 한반도 전쟁위기' '녹화사업의 희생자들'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 -전태일과 그 후' '민족일보와 조용수' 등 15편이 기획돼 목하 종영을 앞두고 있다.
현대사의 미스터리를 파헤치고, 왜곡되거나 편향되게 인식되어온 우리 역사의 상흔을 재조명해 진실이 주는 감동을 추구하겠다는 거창한 기치를 내걸고 시작했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피해자의 고발, 가해자의 변명, 목격자의 증언, 연구자의 분석과 진단을 매우 세밀하게 엮어내 승자와 강자에 유린되어온 역사를 다시 기술하겠다는 각오로 만든 '증언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에 걸맞는 프로그램을 제작, 방송했는지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세간의 질타와 나의 변명
이 프로그램을 둘러싼 세간의 의심과 질타를 필자는 잘 알고 있다. "월간지나 시사주간지에 다 나왔던 것을 뒤늦게 재탕한다"는 정도는 점잖은 편이다. "그때는 뭐하고 있다가 지금에 와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호들갑을 떠는가" 또는 "이제 와서 말하겠다는 걸 보니 '이제' 말할 만한 여건임을 시위하려는 즉 현재의 정권을 빛내주기 위한 프로그램 아닌가"하는 힐난이 그것이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양치기 소년과 늑대' 우화에 나오는 것처럼 한번 거짓말쟁이로 낙인이 찍히면 이를 만회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권위주의 정권 이래 우리 방송이 편파 불공정을 자행하면서 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했던 뼈아픈 전력이 여전히 국민들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 때는 말할 것도 없고 - 이 당시는 방송이 하나의 미디어로서 또는 저널리즘으로서 제대로 기능도 못했고 그만한 '취급'도 못 받은 때라고 치부하더라도- 80년 이후 5·18 왜곡보도에서 시작해 땡전뉴스, 땡노뉴스, 땡김뉴스에 이르기까지 우리 방송은 독립성과 공정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물론 하도 자주 듣다보니 필자도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대한 세간의 질타에 대거리할 말쯤은 준비해두고 있다.
"과거에 방송이 해야 할 말을 제 때 제 때 못한 적이 많았다. 이 점은 분명히 인정하고 반성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도 가만히 있어야 하느냐. 지난날의 잘못을 사과하는 뜻에서라도 지금 더욱 치열하게 말을 해야하지 않겠는가. 주요 증언자가 돌아가시기 전에 육성을 확보하고 최근에 공개되는 비밀문서에 나타난 새로운 사실을 통해 역사를 재평가하는 작업이 정녕 필요한 일 아닌가. 현정권을 빛내려 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다루는 아이템엔 그들이 거북하고 불편해 할 내용도 많다. 너는 과거에 그랬으니 지금도 그렇게 살라는 얘기는 죽을 때까지 끽소리 하지 말라는 말이고, 그럴 경우 결국 누구에게 좋은 일이 되겠는가."
그럼에도 어쩐지 궁색한 것은 사실이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까놓고 말하면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제목에서는 기회주의적인 냄새가 나기도 한다. 침묵하고 있다가 세상 바뀌니까 재빠르게 한건 하려는 듯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 순치와 굴종으로 자리보전하며 살아왔던 게 이 땅의 방송이다. 배경과 숨은 의도에 대해 그런 의심을 받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철제철('以鐵制哲)'과 MBC는 못 믿어!
문득 MBC 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던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때는 바야흐로 1987년경 -필자는 1984년에 MBC에 입사했다- 시국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하루가 다르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중앙일보』의 제1보와 『동아일보』의 가세로 경찰의 물고문과 은폐기도가 폭로되면서 5공정권의 부도덕성에 대한 전국민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그런데 당시의 방송뉴스는 마지못해 따라가는 정도인 데다가 어떻게 하면 국민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릴 것인가만 고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마침 김만철 일가의 탈북이 있었다. 정부는 갖은 노력으로 이들을 데려오려 기를 썼다. 필자의 기억이 맞다면 김만철 일가는 니이가타를 거쳐 한국으로 왔는데 이때 KBS와 MBC 메인뉴스 엥커들은 니이가타항에 가서 뉴스진행을 하는 등 법석을 떨었다. 뉴스의 현장에서 생동감 있는 진행을 한다는 자화자찬까지 곁들이며…. 그때 누구가가 점잖게 한마디했다. 그렇게 현장 좋아하면 박종철군이 물고문 끝에 사망한 남영동 대공분실 앞에서 좀 해보지…. 이 당시 방송의 작태는 이른바 '이철제철('以鐵制哲)'이라는 말로 인구에 회자되었다.김만철(金萬鐵)로 박종철(朴鐘哲)을 제어했다는 얘기다. 지금이야 지나간 시절의 아련한 에피소드를 추억하는 것 같지만 짜장 서글픈 일이었다.
문제는 그 무렵의 일이다. 당시 필자는 대학가 근처에서 친구와 술을 먹다가 술값이 떨어지는 상황에 처했다. 신용카드는 그 시절 대학가에서 학생들을 상대하는 술가게에까지 보급될 정도로 대중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지금만 같아도 다른 방도를 취할 수도 있었겠지만 필자는 술기운을 빌어 MBC 사원신분증 - 방송사가 모여 있는 여의도의 음식점이나 술집에서는 흔히 통하는 수법이었다.-을 당당하게 내밀었다. 곧 현금을 들고 갚으러 오겠다며…. 그때 주인아줌마의 일갈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신분증을 뿌리치며) MBC는 못 믿어!"
그날의 난국이 어떻게 수습되었는지까지는 기억을 못한다. 그리고 주인아줌마의 호통이 그 당시 횡행했던 방송의 편파 불공정 보도 때문인지 아니면 순수하게(?) 업주로서의 의심 때문인지 여부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MBC는 못 믿는다'며 사원신분증을 거부한 아줌마의 질타는 오래도록 나를 괴롭혔다.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방송을 향해 돌을 던지다.
필자가 MBC에 입사한 1984년은 5공정권의 극성기였다. 당시 정권은 거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것같다. 언론은 철저하게 길들여져 있었고 KBS와 MBC에는 당연히 청와대 대변인과 문공부 장관을 앞뒤로 거쳐가는 권언유착형 훼절 언론인들이 사장으로 날아들었다. 항간에는 KBS 1중대, MBC 2중대라는 비아냥이 오고 갔다. 그런 시절에 단지 전망 좋은 직장에서 방송일을 할 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만으로 기를 쓰고 공부해 MBC에 입사하려 했던 몰골이 필자였다.
세상은 원래 그런 것 아닌가. 난다긴다하는 유수한 신문들도 다 그렇게 살고 있는 마당에 내가 뭘 어쩔 수 있단 말인가. MBC가 편파 보도한다지만 '쫄따구'인 내가 하는 것도 아니고 더욱이 나야 스트레이트 뉴스와는 상관없는 일개 교양 피디 아닌가. 당시에 필자가 했던 방송일이란 것은 소비성 정보프로그램이나 몰역사적인 살롱 취향의 교양프로그램이 대부분이었다. 권력자의 의도를 앞장서서 상찬하고 호도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가능하지도 않았고 기회도 없었다는 얘기- 총체적으로는 시청자들의 탈정치화와 우민화에 기여하는 그런 프로그램이 아니었을까 한다.
여하튼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이러한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기엔 대단한 이론이 필요하지 않았고 별 어려움도 없었다. 그리고 아마도 안정된 직장이 주는 일상의 안일함에 자족하며 살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 이미 대학가와 재야에서는 5공정권의 야수성을 규탄하는 가운데 민주화의 불길이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피로 얼룩진 이 땅의 민주제단에는 무수한 희생자가 오르고 있었을 생각하면 제도권 방송의 행태는 참으로 가증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조직에 몸담고 자기합리화의 요설이나 만들어내며 냉소주의로 자신을 비호하고 있던 개개인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겠다. 대학가 술집 아줌마의 "MBC는 못 믿어!"는 그러한 필자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난타하는 죽비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술집에서 MBC 사원 신분증을 안 맡아주는 것은 약과였다. 6월항쟁 국면이 지나면서 국민들은 권력의 시녀인 방송에 노골적인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시청료 거부운동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국민들은 반성할 줄 모르고 역사를 두려워할 줄 모르는 방송사에 직접 몸으로 한 수 가르쳐주기 시작한 것이다. 바야흐로 방송사 중계차가 시내에 나갔다가 분노한 시위대에 돌을 맞고 MBC 로고가 찍힌 회사차로 취재를 나간 차량이 발에 걷어차이거나 애꿎은 운전기사가 각목에 두들겨 맞는 일이 발생했다. 편파뉴스가 보도국 기자들의 전유물이며 그들 중 몇몇의 출세욕을 만족시켜주는 것으로 끝날 뿐 나와는 상관없고 나의 책임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필자를 포함한 대다수 MBC사원들에게 일대 경종을 울려준 사건들이었다. 그들에게 심대한 위기의식과 함께 이대로 있다가는 막말로 맞아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그러한 자각 끝에 방송노조의 결성이 가능했다고 본다.
"직무유기'한 방송인들에게는 참회록으로 읽혀지길
돌이켜보면 관제방송의 인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방송사의 구조와 풍토에서 이 땅의 방송노조는 참으로 지난한 길을 걸어왔다. 무수한 파업투쟁이 있었고 해직의 수난도 있었다. 하지만 권위주의시대에 방송이 자행한 허다한 오류와 죄악에 비하면 그 희생은 사실 미미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더욱이 노조의 태동을 만들어준 것은 학생과 시민들의 희생이었다. 그런 점에서 방송노조는 태생적 업보와 무임승차 시비를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과거 자행한 무수한 편파 불공정 보도와 국민에 대한 기만을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해보자. 어찌 몇 번의 파업과 무노동 무임금으로 탕감될 수 있단 말인가. 나아가 방송노조의 궁극적인 목표는 국민을 위한 올바른 방송 그 자체라고 볼 때 무수한 파업투쟁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은 우리 방송의 책임을 자각하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도 거슬러 올라가면 과거 우리 방송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보상적 실천'의 측면이 없지 않다. 이 프로그램을 제작하다보면 특정한 사건을 당시에 언론이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 꼭 나온다. 냉전적 시각을 벗어나지 못한 채 북한 필망론과 흡수통일론을 부추기며 전쟁상황을 강조했던 일부 언론의 문제가 나온 '94년 한반도 전쟁위기', 우리 언론이 이른바 보도지침에 굴복해 그 숱한 학생들의 희생을 은폐하거나 침묵했음을 알려주는 '녹화사업의 희생자들-군대가서 죽은 아들아', 너무도 열악한 노동현장의 상황을 아무도 알아주자 않고 들어주지 않아 마침내 분신이라는 극한적인 상황에 이르러야만 했던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전태일과 그 후', 이 땅의 반미운동이 발화하는 시점이었으나 고문과 용공조작에 의해 진실이 호도될 때 이를 제도권 언론들이 앞장 서서 전파했음을 웅변하는 '어둠 속의 외침-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등 거의 모든 프로그램에서 과거 우리 언론이 편파 불공정의 길을 걸어왔음을 낱낱이 증언하고 있다.
이제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종영된다. 척박한 우리의 현실에서 이 같은 프로그램이 다시 빛을 보게 될지는 미지수다. 앞으로 할 수 있는 아이템들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북파공작원, 의문사, 도산한 대기업의 이면사, 대형사건과 사고의 뒤안길 등 많다. 그러나 그 어떤 아이템을 하든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방송은 세월 지난 뒤에 뒤늦게 '이제는 말할 수 있다'며 너스레를 떨 것이 아니라 '말해야 할 그때, 그때 말하는 게' 백번 천번 옳다는 것이다. 바로 지금의 뉴스에서 바로 지금의 시사 고발 프로그램에서 '지금 이곳에서'의 일을 용기 있게,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 정도다. 그런 점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누구보다 이 땅의 방송인에게는 순치와 굴종 속에서 직무를 유기했던 지난 시절 자신의 서글픈 초상을 확인하고 반성하는 참회록으로 읽혀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먼저 비겁함과 기회주의로 스스로를 기만하며 살아왔던 필자에게 가혹하게 다가온다.
월간말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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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ST UPDATE: 2004.11.02 - 1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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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울린 한마디 - 정현종 "나는 밥에 취해서 ...
방송을 위한 변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