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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정글화 (http://jungpd.co.kr http://jungpd.co.kr)
Subject   추리소설 <기암성>과 에트르타 코끼리 바위
추리소설 <기암성>과 에트르타 코끼리 바위

 

(여행 스케치 2007년 2월호 '지구촌 에스프리')



한때 추리소설에 심취한 적이 있었다.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에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에르큘르 포와로는 기본이고, 가니말 경감을 농락하는 괴도 루팡의 이야기는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여기에 영국 작가 체스터턴의 브라운 신부 이야기는 추리소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제에서 깊이가 있는 철학적 이야기다. 그에 비해 역사와 전통이 약하기는 하지만 한국에도 흥미로운 추리소설이 있다. 김내성의 <마인>에서 등장하는 유불란 탐정은 아쉬운 대로 흥미진진하였다.

이렇게 추리소설에 탐닉한 때는 바야흐로 어언 30년도 넘은 중학교 시절의 일이다. 겨울방학을 맞아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책과 헌책방을 순례하며 모은 세계각국의 추리소설을 쌓아놓고 동지섣달 긴긴밤을 보냈던 기억이 새롭다. 그중에서도 오랫동안 내 뇌리에 남아있던 작품은 프랑스 작가 모리스 르블랑의 <기암성(奇巖城)>이다.

소설 <기암성>을 읽은 지는 어언 30여년이 넘어 줄거리가 흐릿하다. 대부분의 모리스 르블랑의 작품이 그렇듯 여기서도 괴도 루팡과 홈즈가 한판승부의 대결을 벌이는데 이시도르 보트를레라는 탐정도 등장했다(이름이 가뭇했는데 인터넷의 도움으로 되살렸다). 여기서 상세한 줄거리를 말할 계제는 아닌 것 같다. 다만 작품속에서 루이 왕조 때의 보물들을 바위 속 비밀창고에 두고 루팡과 홈즈 그리고 보트를레가 치열하게 이를 다투는 상황이 나오는데 바로 이 곳을 ‘기암성’이라고 했던 것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원제 에기유(L'Aiguille creuse)는 ‘바늘구멍’을 뜻한다고 한다. 번역자는 그보다는 훨씬 신비스럽고 모험적인 ‘기암성’이라는 제목으로 바꾼 것이다. 아마도 한국에서는 이 소설은 '바늘구멍'보다는 '기암성'으로 더 알려져 있을 것이다.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 코끼리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데 그 속은 비어 있고 해저터널로 연결되어 비밀창고로 쓰인다는 설정은 너무도 그럴 듯했다.

인터넷의 추리소설 매니아에 따르면 모리스 르블랑의 <루팡>시리즈를 내용 면에서 살필 때 세 가지 요소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추리를 기본으로 하는 본격적인 추리탐정소설이고, 또 하나는 역사 또는 전설의 수수께끼를 중심으로 발전시키는 괴기모험소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가 현실의 사건을 소재로 구상한 모험탐정소설이라고 한다. 첫번째 것에 속하는 작품으로는 <괴신사>, <괴인대 거인>, <버네트 탐정사>등이 있고 두번째 것은 <기암성>, <악마의 저주> 세번째 것은 <금삼각>, <수정안>등을 들 수 있다고 한다. 여기 <기암성>은 바로 괴기모험소설에 드는 것인데 실제로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에 코끼리 바위를 두고 그런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로 치면 금오신화류의 전기(傳奇)소설인 셈이다. 지금은 다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나로서는 <기암성>보다 재미있는 작품이 없었다고 말하고 싶다. 왜냐면 ‘기암성’은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세계의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장소와 전설을 이용해 절묘하게 상상력으로 양념을 치고 맛깔나게 버무린 것으로 더욱 핍진(逼眞)한 실감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너무 소설의 재미에 맛을 들였는지 한동안 꿈에서도 기암성이나 루팡이 나와 잠꼬대를 했다가 가족들에게 놀림을 받은 일이 있다. 그리고 이후 오랜 기간 우리나라 땅 어딘가에도 그런 바위 안에 보물창고가 있을 거라는 상상에 빠지기도 했다. 1970년에 공주에서 백제 무녕왕릉이 발견되어 순금 왕관 등 엄청난 유물이 출토되는 뉴스가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한국판 기암성이라고 생각을 하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오랜 세월이 지나 배수구 속에 묻혀 잊혀졌던 고분이야말로 기암성과 다를 바가 없을 일이다.

각설하고 1970년대 초에 중학교를 다니는 어린 학생에게 프랑스 노르망디는 너무 멀었다. 학교에서는 그에게 노르망디를 2차대전의 판세를 엎은 ‘지상에서 최대의 작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현장으로 더 각인시켰다. 하긴 추리소설 따위(?)에서 줏어들은 애기를 학교에서 얘기한다면 헛소리로 치부될 일이었겠다. 주입식 교육과 입시위주의 공부를 하는 교실에서는‘기암성이라니 어디서 그런 기이한 소리를 하고 다니냐...’라는 말이나 듣기 십상이다.

그런데 실망할 일은 아니었다. 몇 년 뒤 고등학교 미술시간에 기암성을 다시 만나는 기쁨이 있었다. 사실주의 쿠르베와 인상파 모네를 배우는 시간에 ‘앗 기암성이다...’라고 외치는 일이 일어났다. 그들이 그린 풍경화에 바로 그 기암성의 코끼리 바위를 그린 그림이 있었던 것이다. 쿠르베는 ‘비온 뒤의 풍경’을, 모네는 ‘항구의 풍경’과 ‘절벽위에서 본 에기유 풍경’ 등을 그렸는데 바로 그 그림이었다. 비로소 이곳의 지명이 노르망디의 ‘에트르타(Etretat)’임을 알게 되었다. 모리스 르블랑에서 쿠르베를 지나 모네에 이르러 비로소 코끼리 바위 기암성은 새롭게 구체성을 띠고 내게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지구과학시간에 에트르타의 단애(斷崖) 지대는 전형적인 해식(海蝕) 지형의 하나로 '확인사살'된다.

그 노르망디 에트르타의 코끼리 바위를 마침내 직접 현장에서 보는 일은 지난해 7월에 기적처럼 찾아 왔다. 모처럼 북유럽 여행을 갔다가 파리에서 짜투리 시간이 난 김에 당일치기로 노르망디 해안을 가게 된 것이다. 이날 나는 예의 코끼리 단애(斷崖) 에트르타를 조망하는 여정을 보냈다. 파리에서 노르망디까지 한걸음에 가기는 만만찮은 강행군이지만 다행히 긴 여름해가 일행을 도와 주었다. 에트르타 코끼리 바위, 절벽 위의 성당, 갈매기떼, 해변의 풍광...그리고 지역 특산물이라는 홍합요리와 사과주 시드르의 환상적인 만남... 모리스 르블랑의 <기암성> 이후 30여년 만에 바로 그 현장에 온 기분은 환호작약의 바로 그것이었다.

에트르타 단애는 높이가 거의 90미터에 달한다. 그리고 해안선을 따라 회백색의 절벽이 길게 뻗어있다. 단애 끝 바다는 대서양이다. 계속 나아가면 필경 영국이 나올 것이다. 그 바다에 요트들이 삼삼오오 떠 있다. 절경이다. 에트르타에 반한 알폰소 카르라는 이는 “친구에게 처음으로 바다를 보여준다면 서슴없이 에트르타를 보여주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충분히 공감이 가는 말이다. 그림이나 사진에서 보던 것보다는 더 장대하고 스케일이 컸다. 이 바위를 바늘 모양으로 보고 속이 비어 있다는 생각을 한 작가의 상상력이 놀랍다. '코끼리 바위'보다는 '기암성'이, 또 그보다는 '바늘구멍'이 더 그럴듯하다.

사실 코끼리 모양 바위는 세계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다. 자연이라는 조각가께서는 코끼리를 그리도 좋아하시는지 지구 곳곳에 여기저기 코끼리를 조각해 놓았다. 내가 본 코끼리 조각은 중국 운남성 석림에도 있고 호주에도 있고 가까이는 한국의 백령도 두무진에도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노르망디 에트르타의 코끼리 바위처럼 크고 잘 생긴 놈은 없을 것이다. 갈매기와 해조음이 어우러진 해안의 단애 풍경은 단연 압권이다. 인정할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소설 <기암성>의 유명세로 에트르타 마을에는 ‘루팡의 집’이 있다. 소설 속 가공의 인물에 대한 기념관이라니... 전 세계에서 모여든 관광객들의 성화를 알 법하다. 다만 ‘루팡의 집’에 들어가 전시품들을 하나씩 세밀히 들여다 보고 코스프레 하는 사람들도 만나고 싶었는데 그러지는 못했다. 이날 나는 에트르타에 이어 <남과 여>로 유명한 도빌 해변과 작은 미항 옹플러르까지 도는 일정으로 몹시 분주했다. 시간관계상 아무래도 무리인 듯했다. 그것이 지금도 아쉽다. 다음에 다시 갔을 때를 위하여 볼 것을 남겨둔 것인가. <기암성>을 읽은 이후 30여년 만에 비로소 노르망디 에트르타를 처음으로 갔는데, 내 남은 인생에서 이곳을 또 한번 찾을 일이 과연 있을 것인가.

만약 다시 코끼리 바위를 찾아 프랑스 에트르타를 간다면 이제는 ‘루팡의 집’도 들르고 큰 코끼리 바위, 작은 코끼리 바위도 다 발로 밟고 싶다. 마을 어딘가에 작가 모파상 기념관도 있다는데 모두 찾아봐야 하겠다. 이 정도 풍광이면 능히 프랑스의 작가, 화가들에게 영감을 준 원천이 될 만하다. 생각해 보면 프랑스 에트르타의 코끼리 바위는 <기암성>이라는 소설에 주요 무대로 등장해 동방의 한 독자를 30여년 만에 불러들였다. 작가의 상상력은 이처럼 위대하다. <기암성>이 근 100년전인 1909년에 발표된 소설임을 생각해 보라.

생각해 보면 한국의 백령도 두무진이 그러지 말란 법이 없다. 기왕이면 두무진 코끼리 바위를 소재로 한 좋은 소설 작품이나 명화가 나와 세계인들에게 한국에도 '바늘구멍'이 있음을 만방에 알려 주었으면 좋겠다. 한국의 작가, 화가는 다 어디로 갔는가. 정 안 되면 백령도가 무대인 심청전 이야기 어느 한 구석에 두무진 코끼리 바위를 은근슬쩍 집어넣기라도 해야 할 일이다. 심청이 뛰어든 바다인 인당수가 두무진에서 멀지 않다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심청전 두무진 코끼리 바위를 본 프랑스 독자가 한국을 찾을 차례인가. 에트르타의 감흥은 두무진 여울목에서 이렇게 메아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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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7.01.03 -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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