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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정길화
Subject   그 억세게도 가난했던 소년
30대 후반의 사람들 중에서「저 하늘에도 슬픔이」라는 제목의 일기책이나 영화를 기억하지 못하는 분은 드물 줄 안다. 혹시 뇌리에서 이를 빠뜨릴 사람도 '이윤복'이라는 이름을 말하며 '아, 그 억세게도 가난했던 소년…'하며 그를 기억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덧붙여 뚜렷이 생각은 안 나지만 아무튼 무지무지 하게 슬픈 사연이었다는 회상이 주마등처럼 스치리라 믿는다. 적어도 이런 기억의 공감대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윤복'이란 존재는 '석류'라는 말을 듣고 입안에 침이 괴는 조건반사 이상으로 한때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고(故) 이윤복씨의 두 남매, 가영이와 명진이그러나 그뿐, 이제 누구도 한없이 슬프고 애닯고 답답했던 그 이야기를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세 번에 걸친 영화화(「저 하늘에도 슬픔이」와 속편「저 하늘에 이 소식을」이 1960년대에 제작 상영되었고, 지난 1984년 「저 하늘에도 슬픔이」가 리바이벌 제작 상영 됐다)와 주인공 이윤복씨 주변에 일이 있을 때마다 추적한 매스미디어의 집요한 노력이 있긴 하였지만 '보릿고개'라는 말이 우리 네 삶의 현장에서 사라지는 것을 고비로 이윤복 씨의 존재도 우리에게 거의 잊혀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가 궁핍한 시대를 온몸으로 살다가 급성간염으로 발병한 지 2주일 만에 끝내 유명을 달리한 것이 지난 1990년 1월의 일이었음에도 세인들은 그의 생사 여부조차 알고 있지 못한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인간 이윤복을 기억해야 할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우선 우리 사회의 '냄비 증상'에 관한 반성이다. 무슨 사건이 터지면 벌떼처럼 달려들어 사생활 침해가 되든 초상권 침범이 되든 구석구석 쑤셔대다가 조금만 시간이 지났다 싶으면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식어버리는 우리네 나쁜 버릇.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냄비 안에 들어가 곤욕을 치렀는지 모른다. 구봉관산에 매몰되었던 양창선 씨가 그러하였고, 천재소년 김웅용이 그러했고 또 누구가 그러하였고…등등. 그러한 악습에서 벗어나 차분히 그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뜻을 음미해야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감동(感動)을 거부하는 이 시대에 대한 인간회복 선언이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들이 걸어온 과거의 역정에는 이윤복으로 상징되는 삶의 양상이 있었고, 이윤복이란 이름만을 눈물짓게 되는 경험의 공유틀이 있었다. 그러한 목가적 전설이 사라지고 오로지 이기(利己)와 물욕(物慾)이 분별없는 질주로 치닫는 이 시대를 붙들어 매기 위한 동아줄일 수 있기를 기대하는 까닭에서 우리는 인간이 이윤복을 불러일으켜야 하는 것이다.

그 초혼(招魂)의 매개는 이승에 남은 사람들 즉 고(故)이윤복 씨의 유가족들이다.

미망인 이병숙 씨의 말이다. "돌아가셨다는 게 실감이 안 납니다. 금세라도 문을 열고 '여보 나 다녀왔어'하고 들어 올 것만 같아요. 아들 명진이도 '아빠 로봇 장난감 사 가지고 오는 거지?' 라고 말해요. 그럴 때마다 속이 상합니다. 며칠 전, 그이가 살아 있을 때 친구들이 찍어둔 비디오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가슴이 답답하더군요. 명진이가 갑자기 망치를 들고 TV앞을 가더니 '아빠가 저 안에서 계속 안나오는데 망치로 TV를 깨면 아빠가 나올 거야'라며 망치를 휘둘러 말리려는데 눈물이 쏟아져 혼이 났습니다."

친정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이윤복씨와 연예 결혼하였던 이병숙 씨. 고(故)이윤복 씨 (살아있다면 올해 42세)와의 10년 남짓 결혼생활에서 1녀(가영·9세)와 1남 (명진·5세)을 두었다. 그녀는 처음에 그가 그 유명한 이윤복 씨인 줄은 까마득하게 몰랐다고 한다. 그저 남자답고 씩씩한 사람같기에 끌렸다는 것인데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고 몹시 당황했다는 것이다.

"뭐라 그럴까. 나처럼 평범한(?) 여자는 격에 안 맞다는 자격지심 같은 것이 들었어요. 세간에 알려진 사람이라는 데에서 어떤 막연한 신비감이 들었었나 봐요" 결국 그것을 저돌적인 공략으로 깨뜨린 것은 이윤복 씨였고 '가난해서' 또는 '쓰잘 데 없이 유명해서' 반대하던 집안 사람들도 승복하고 말았다. 더욱이 동성동본이면서도 결혼에 이르렀다니 그들의 사랑을 알 만하다.

한때의 각광이 지난 후 이윤복 씨가 살아 간 삶은 이병숙 씨의 회고를 통해서 구체화된다.

"가난은 죽을 때까지 그의 곁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책 출판이다, 영화회다해서 그이가 대단한 돈을 번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당시 27만원 정도가 현금으로 들어왔지만 그 돈은 사실 무엇을 하기엔 많은 돈이 아니었던 듯 합니다.

문제는 「저 하늘에도 슬픔이」이후에도 오랫동안 그를 둘러싼 생활환경과 조건들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부모님들간의 불화, 절대 빈곤 등은 공부에 전념할 여건을 만들어 주지 못했습니다."

시쳇말로 빛좋은 무엇이라고 하더니 '유명세'에 비해선 실속이 없었던 것이다. 대학진학에 실패한 그는 생업을 구하기 위해 취업전선에 나서야 했는데 이때 단연 인간 이윤복의 진가가 발휘된다.

"이곳 저곳에 이력서를 냈지만 변변치 못한 학력에 그렇다고 무슨 '빽'이 있는 것도 아닌 그에게 이렇다 할 직장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주변 사람 중에서 「저 하늘에도 슬픔이」의 주인공임을 밝히면 그 회사에서 대외홍보차원에서 취직시켜 줄지 모른다고 그이에게 귀뜸을 했다더군요. 그러나 애기아빠는 '내 힘으로 살겠다'며 그런 짓을 한사코 하지 않았습니다"

대개의 경우 요절하여 앞서 이승을 떠난 사람에게 우리들의 인정은 후하다. 살아남은 이의 미덕으로 그를 미화하고 칭찬하려 든다. 여지껏 살다간 그 인생만을 토대로 신화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상상(想像)의 중단이 때로는 신화를 빚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윤복 씨에 관한 한 아무리 상상의 폭을 넓히고 연장하여도 그 심지 깊었던 삶의 내력에 어떠한 분칠도 불가능하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의 삶을 고스란히 이어받는 유족들에게서 그대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 아빠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배워둔 미용 기술이 지금은 세 가족이 먹고 사는 밥줄이 되었다"아기 아빠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미용 기술을 배워두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것이 지금 먹고 사는 밥줄이 되어 버렸습니다. 기술을 점차 배우고 익혀 한 10년이면 저도 나름대로 수준에 오르지 않겠어요?" 라며 가위를 열심히 놀리는 이병숙 씨는 지금 대구 시내의 한 미용실에서 종업원으로 일한다. 월급 30만 원에 부정기적인 팀을 합해도 한달에 수입은 50만원이 채 못 된다. 이 돈으로 두 자녀의 양육과 교육 그리고 노후를 위한 대비까지 해야한다. 다행히 지금 기거하는 곳은 무료복지시설. 영세민 중 미망인과 그녀의 자녀들에게만 입주자격이 있는 대구시 기독교 가정 복지관에 3년간의 시한부로 거주하고 있다.

"가영이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 한두 해는 우리 가족들이 참 행복했던 때였습니다. 가족끼리 오손도손 잘 지냈습니다. 직장에서도 어느 정도 기반이 잡혔고 생활도 점차 안정궤도에 오를 즈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병숙씨의 말 꼬리가 흔들린다. 막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 만한 때에 비운의 춘사(椿事)로 말미암아 돌아오지 못할 길로 떠나고 만 것이다.

자신이 어려웠던 시절을 항상 기억하며 스스로 힘으로 이를 벗어나고자 하였던 이윤복 씨.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썼던 이윤복 씨. 그리고 자신의 불우한 과거를 돌아보고 비슷한 환경에 처해 있는 소년가장을 돕고 싶어 했던 그는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슬픔없는 저 하늘나라로 떠난 것이다.

이병숙 씨는 이즈음 시부모의 화해에 모든 힘을 쏟고 있다. 끔찍이도 아꼈던 큰 아들을 잃어다는 점에서 허탈함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없는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유감스럽게도 당신들은 젊은 시절의 일탈(逸脫)에서 비롯된 서로의 증오를 추스리지 못하고 지금도 별거중에 있다. 일흔이 다 되어가는 그 나이에. 부모의 불화가 이윤복의 삶을 그렇게 빚어낸 단초였음을 굳게 믿는 병숙 씨로서는 두 분의 화합이야말로 먼저 간 남편의 숙원을 이룩하는 길임을 확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글쎄요 저로서는 당사자가 아니어서 뭐라 말씀을 못 드리겠습니다만 이젠 마음의 문을 열고 서로를 용서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어요. 서른세 번 용서하라는 말씀이 있기도 하지만요. 그 다음엔 무엇이 소망이냐구요? 가영이 명진이 잘 되는 것 말고는 더 바랄 일이 없어요. 네? 새사람 만나서 새 출발 하라구요? 먼저 하늘나라 간 애기아빠를 나중에 만날텐데 어찌 그럴 수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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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2.04.07 -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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