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1991년, 비관적 전예측(全豫測) - 현실극복을 위한 의도적 비관
이      름: 정길화
작성일자: 2002.04.10 - 13:07
불가측과 불투명의 한해가 다가오고 있다. 바야흐로 1991년. 한치앞을 내다 볼 수 없는 방송가의 전도는 우리를 때로는 비감하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울분을 금치 못하게 하기도 한다. 이런 때마다 우화와 알레고리의 세계는 우리를 유혹한다. 합리적 분석이 힘을 잃고 보이지 않는 거대한 무엇에 의하여 유린당할 때, 사람들은 이따금씩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펼친 1991년의 전망은 의도적인 비관으로 일관하고 있긴 하지만, 이러한 상상 자체가 찰나적인 현실도피의 그것이 아니라 현실극복의 그것이어야 함을 굳이 말하고 싶다. 생각은 자유지만 의지는 선택의 영역에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역사라는 이름으로 남는 것이다. 박두한 또한 해의 모습이 과연 어떠한 것이어야 할지를 각자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1. 통과의례에 불과했던 국정 감사

새해에 들어서자 가칭 서울방송 설립작업이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지자제 선거, 국회의원 선거, 대통령 선거 등 정치일정이 예정된 수순대로 착착 진행될 조짐이라 가장 중요한 사전 정지작업으로서 방송구조개편이 갖는 중요성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다. 비록 1990년 연말 국회에서의 국정감사 때 「민방」건이 어지간히 도마 위에 오르긴했지만 철저하게 오리발 작전으로 일관, 고비를 넘김으로써 순풍에 돛단 듯이 일은 진행되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그 무렵에 민방 지배주주선정을 백지화하라느니 하며 이러쿵 저러쿵 들끓을 땐 민방주도세력에겐 아닌게 아니라 다소간 켕긴 점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거꾸로 매달아도 시계는 돌아간다고 죽었다고 복창하는 셈치고 반죽좀 맞춰주니, 세월이 약이라고 그럭저럭 넘어간 것 같다. 오히려 그것이 신생아의 탄생을 위한 산고쯤으로 여겨져 하나의 통과의례 역할까지 해준 셈이니, 민방주도세력으로서는 용두사미에다 태산명동서일필의 짭짤한(?) 수확을 거두었다. 당시 신문매체들이 이례적으로 연일 대서특필하긴 했지만 버스 지난 뒤 손흔드는 면피용이었고, 제 꿍꿍이속은 어차피 빤한 통수였다. 게다가 당장 제 주머니 축나는 일 아니면 강건너 불로 여기는 국민들의 무관심과 건망증으로 민방에 관한 논란은 이미 과거지사가 되고 만 것이다.

2. 인사태풍의 연쇄반응, 그 천태만상

민방작업이 본격화하여 궤도에 오르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초기엔 국감의 여파로 모양새 사나운 서울방송에 동참하려는 사람들이 얼마 없었으나 KBS, MBC 양방송사에서 자회사 추진이 진행되자 그것이 자연스런 계기가 되었다. 여러 인사가 계속되면 이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하기 마련이고 연쇄반응의 한 고리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에 따라 MBC는 자회사 약진파와 잔류파로 일단 대별되었다.

수면하에서 부산한 탐색을 하던 민방잠입파는 관망을 하다가 하나둘씩 여의도광장을 횡단하여 새로운 대열에 가담하였다.

민방으로 「전향」하는 신종방법 중의 하나는 남의 눈을 의식해 일단 제3의 프로덕션으로 옮겼다가, 일정기간 경과 후, 서울방송으로 가는 전술을 구사하는 것인 바, 그래도 양심은 있다는 평을 받았다.

근본적으로 피고용인 입장일 수밖에 없는 그들이 보다 나은 조건의 「직장」을 찾아 떠나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중도우익, 국익우선」의 깃발아래 그저 자신의 기능을 팔러 떠나는 것은 방송인으로서는 꼴사나운 행렬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동료들의 희생이 묻힌 무덤의 흙도 채 마르지 않았음에랴.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라는 귀한 말씀이 여의도에 역사하실 그 무렵, 우리를 가장 슬프게 한 것은 항상 근엄한 얼굴로 사원들 앞에서 품위를 잃지 않던 사내 유력 인사들의 「여의도 광장 응용포복으로 건너가기」였다. 단체협약 체결시나 노동쟁의시 항상 "n년차밖에 안 되는 것들이 회사를 어쩌려 한다"느니 "MBC의 기둥은 내손으로 만든 것"이라느니 하며 개국공신을 자처하기에 주저함이 없던 그들의 전향은 MBC정신의 실종을 단적으로 드러낼 만큼 충격적인 것이었다. 논공행상이 끝났으니 또다른 공신의 자리를 탐하려 하였음일까. 좌우간 「직업선택의 자유」운운하며 엑소더스를 감행한 그들에게 시시비비가 끊이지 않았다.

남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문제가 없을 수 없다. 그 무렵 뻑하면 전화통을 들고 "아 글쎄요 생각해 봐야겠는데요"하고 헛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설이 있는 가운데, 일부 능력있는 사원은 「떠나지 않을테니」 조건을 개선해 달라는 과감한 베팅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 이처럼 저마다 잘났다고 백가쟁명의 양상을 이루는 상황에서 여의도동 31번지는 뒤숭숭하기 이를 데 없어 뜻있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였다.

3. 계속되는 노조무력화, 그 좌충우돌의 끝은?

상반기의 인사태풍이 잠잠해진 다음에도 여의도 MBC 사옥 위의 하늘은 계속 우울한 보랏빛이었다. 단체협약체결을 앞두고 회사측은 무의미한 소모전을 계속하였다. 이른바 노조위원장 대표성 시비에 관한 논란이 그것. 회사측은 끝까지 노조위원장의 자격에 관해 문제를 걸고 넘어지며 협상테이블에 앉기를 거부했다. 노조는 위원장이 아닌 부위원장 또는 다른 경로에서 협상대표를 임명하였다. 그러나 회사측은 자격의 유효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위원장으로 있는 조합에서 선출한 협상대표는 결국 마찬가지라는 해괴한 논리를 내세우며 대화를 거부하였다. 심지어 단체협약 체결해봤자 지키지 않을 것이며 그럴 경우 노조에서 아무런 방법이 없지 않냐며 비아냥거리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이미 자회사 파견에다 민방으로 인원이 유출됨에 따라 대대적인 인사발령이 있어 사원들이 바뀐 프로그램 바뀐 업무에 정신이 없을 것까지 염두에 둔 조직적인 노조 무력화작업이었다. 부지런한 꿀벌은 슬퍼할 겨를도 없다는 말을 기막히게 써먹는 격이다. 회사가 풍전등화에 처했는데 노조가 다 뭐냐는 안보논리의 등장은 그러기에 필연적이었다.

회사의 모든 정책과 결정은 밀실에서 이루어지고 토론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누란의 위기, 이 중차대한 난국에 무슨 노조며 노사협의란 말이냐, 노조말 듣다가 지금까지 뭐 잘 된 일이 있느냐. 차제에 노조는 철저히 무시하여야 한다. 검증과 견제의 파트너가 없는 회사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격변기의 방송계를 좌충우돌하였다. 국장 추천제, 공정방송협의회는 거부되거나 무산되었다. 그 대신 전임자 수 축소, 전임자에 대한 급여 시비, 해고 무효 소송 계류자의 출근 봉쇄 등 노조를 자극하는 전술적 도발이 줄을 이었다. 최소한의 공동운명체 정신과 민주방송실천의 원칙조차 상실한 가운데 노사의 반목은 심화되었다.

4. 광고량 축소, 시청률 잠식 … 드디어 프로그램에도 치명상이 오고

MBC를 둘러싼 외적 내적 조건과 환경의 악화는 고스란히 프로그램에 반영되었다. 우선 외적으로 민방이 신설됨에 따라 광고물량이 쪼들리기 시작했다. 약 1천5백억 정도의 신규 민방 광고시장에 기존 대기성 광고물량 700∼800억으로는 절반밖에 되질 않으니 당연한 계산이었다. 방송광고공사의 콧대가 드높아지면서 심야시간대 프로그램은 무 스폰서로 방송되기에 이르렀다.

채널이 하나 더 늘면서 시청률 경쟁이 심각해 지는 것은 불을 보듯 빤한 일이었다. SBS는 원래 라디오의 경우 5∼6월경 TV는 10∼11월 경 방송예정으로 출발하였으나 고위층과 실세의 엄호하에 박차를 가해 공정을 3∼4개월씩 앞당길 수 있었다. 교묘한 편성으로 양 방송사의 허점을 잠식, 치고 빠지는 작전으로 상당한 시청률을 초기에 확보하였다. 「주인있는 방송」,「중도보수의 방송」을 표방하는 SBS는 정부의 정교한 여론조작에 힘입어 방송계의 이니시어티브를 장악하는 마당에 당도한 것이다.

이러한 광고량 축소, 시청률 잠식 등의 상황에 놓이자 MBC는 발칵 뒤집어졌다. 어떤 조직의 탄력성은 그 조직이 위기상황에 놓였을 때 그 실체가 파악되기 마련이다. 저력있는 회사일수록 사원들의 자생적인 역량이 효율적으로 결합되면서 난국에 대처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방법은 현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으로, 또 표피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으로 추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창사 이후 최고의 위기에 회사는 단세포적이고 일차원적인 방법으로 대응한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다. 보도는 폭로주의로 제작은 선정주의로 밀어붙인다. 어차피 허울뿐인 공영방송 아니랴. 그리고 제작비 동결을 선언하고 몸으로 때우기, 제작시 웬만하면 그냥 가기, 그러나 결과에는 엄중히 문책하기 등의 철저한 경제원칙, 결과주의를 실시한다.

서슬이 시퍼런 이 마당에 내적으로도 아무런 대책이 없다. 노조에서 추진하던 일체의 프로그램 관련 사항도 일제히 중단된다. 좋은 뉴스를 위한 건의서, 프로그램 개편시 의견 개진 등이 모두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되고 만다. 뉴스데스크 속기록 작업도 실속이 없고 번거롭다는 이유로 중단되고 민실위의 프로그램 토론회가 회사측의 반대, 담당제작부서 중간간부의 몰이해, 일부 제작자의 비협조로 사사건건 성원미달 유회된지 오래다.

5. 30년만의 제자리(?) 찾기, 공영방송은 어디로…

하반기로 접어들면서 새로운 뉴스가 방송계를 강타하였다. 이른바 MBC본사 및 계열사에 관한 원주주들의 주식반환청구소송. 언론통폐합의 원흉들은 그대로 두고, 민사적인 주식 양도에 관한 건에만 시효를 「임의」적용시켜 재판 초기부터 5공청산이 아니라 6공의 또다른 포석이자 계산이라는 분석이 자자했던 바로 그 재판이다. 몇 년은 질질 끌 줄 알았던 이 재판은 초고속으로 진행되어 원주주들의 승소 판결이 있따랐다. 그 결과 서울 MBC의 사실상 민영화가 초래되었고 이를 기정사실화 고착화하기 위한 방송법 재개정 논의가 대두되었다. 그러자 회사측은 10년이 넘도록 어찌됐든 지켜왔던 공영방송의 기치를 얼른 내리고 새 주인을 향해 추파를 던졌다. MBC의 민영화는 30여년만의 제모습 찾기로서 이제 비로소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라고. 다만 거듭된 안팎의 와해 시련에 지치도록 지친 노조만이 짤막한 성명서를 내었으나 대세를 돌리기에 역부족이었다. 이미 이미 각 언론사 노조들은 치명적인 극도의 자사이기주의, 매체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있어, 공영방송 하나가 있든 없든 그래서 야기되는 제 문제가 심각하든 않든 전혀 관심이 없었다. 수년간 착착 진행되어온 언론구조개편의 피날레가 장식되는 순간이었고, 그로써 언론장악, 영구집권 등의 음모가 실현될 직전의 단계였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설마가 사람잡고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을 이번 만큼은 말기로 하자. 결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더욱 극한적인 상황으로 묘사하도록 만들었다. 의지의 영역에서 얼마나 실천으로 최선을 다할 것인가만이 앞으로의 과제이리라.

망언다사(妄言多謝)….

문화방송 노보 1990년 12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