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역대 MBC 사장 vs 노조위원장 열전
이      름: 정길화
작성일자: 2002.04.10 - 13:20
MBC노조 창립이래 거쳐간 MBC사장은 황선필, 김영수, 최창봉 사장, 그들의 현주소는 어디일까. 노조와 불구대천(不俱戴天)의 관계처럼 대립하던 그들은 MBC를 떠난 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리고 이즈음의 MBC와 MBC노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런 반면 노사의 길항적 대립관계에서 노조원의 강고한 단결을 이끌면서 때로는 권력과 회사로부터 표적이 되어 탄압을 받고 희생을 치렀던 당대의 노조위원장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정기평, 강성주, 안성일, 이완기...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시대의 상징이 되어 뜨겁게 한 역사를 아프게 앓았던 이들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이 소박한(?)의 의문을 풀기 위해 <문화노보>는 지령 100호를 계기로 특별히 이를 취재해 보았다.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해 전임사장들의 근황은 전화 인터뷰로 취재되었음을 밝힌다. (편집자 주)

Ⅰ. 전임 사장

1. 황선필 사장
(1986.2.15∼1988.8.29)

재임중 노조 창립을 맞은 불운한(?) 경우. '노조'의 '노'자도 없던 MBC에 노조가 생겼고 우여곡절 끝에 대세가 결정나자 임금과 근로조건 외에 공정방송을 노조가 거론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는 '소신'을 밝혔다. 결국 방송사 첫 노조인 MBC노조가 결행한 방송사상 첫 파업의 와중에서 MBC를 떠났다. 1988년 8월 29일의 일이다.

·근황은 어떠신지요?: 집에서 책이나 보고 있다. 떠난 뒤로 미국 보스턴대학에 객원연구원으로 한 1년 가 있던 것을 제외하고는 그저 그렇게 지낸다.

·한때 방송개발원장 내정자로 하마평이 있기도 했는데...: 그런 기관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신문에 이름이 나고 그랬다. 내 생각 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제 시간이 좀 흘렀는데 재직시절을 되돌아보면...: 뭐 글쎄. 떠난 지 5년이나 된다. 오래된 얘기라 기억도 안 난다. 그 사이 사장도 3번이나 바뀐 것으로 안다.

·섭섭하다든지 그런 생각은 안하셨습니까?...: 섭섭할 게 뭐 있겠어. MBC 구성원들이 열심히 하면 좋은 방송을 만드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좋은 세상이 된다. 세상이 잘 되면 구성원들도 좋아진다. 그런 상호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방송노조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시대적 상황의 소산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 원론적 얘기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내 소신엔 변함이 없다. 노조는 목적이 분명해야 하고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노조는 피사용자의 기본적인 권익을 주장해야 하는 것이고 곧 보수와 근로조건의 개선에만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의 이른바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MBC의 공정성과 독립성 측면에서 문제가 많았다고 봅니다. MBC노조가 MBC의 공정성회복을 위해 활동한 것은 불가피했고 그런 만큼 성과도 있었다고 보는데...: 범위를 확대하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런 점이 있다면 딴 차원에서 해야지 노조가 나서서야 되겠는가. 범위를 넓히면 노조의 성격이 애매해진다.

·5년전 이맘 때 MBC를 떠났는데 그때 꼭 그렇게 끝냈어야 했는지요. 그때 일을 좀...: 그것은 다 내 성격탓이고 부덕의 소치라 생각한다. 나도 수재니 엘리트니 하는 소리 들으며 공부했고 사회에서 격려받고 잘 한다는 소리만 듣다가 그런 일을 겪으니 그냥 그만 두고 싶었다.

·최근의 방송상황에 대해 한 말씀...: 떠난 뒤는 관심을 가지지 않아 잘 모른다. 앞으로는 지켜 보겠다.

2. 김영수 사장
(1988.11.2∼1989.2.10)

황선필 사장이 떠난 뒤 직무대행 체재로 공석중에 있던 MBC 사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유정희 국회의원 등 그의 전력이 시비를 일으켜 노조를 비롯한 사내의 반발을 받았고 끝내 취임식도 제대로 못한 채 사장직을 물러났다. 그 뒤 한국종합화학 이사장직을 역임하고 방송개발원 원장으로 있다가 올해 5월경 그만두었다.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방송개발원장은 임기를 다 마치셨던 것인지요…:임기가 내년 9월까지였는데 그때 방송계 전반에 사람이 바뀌는 추세가 있었고… 뭐 그래서 그만두었다.

·MBC사장으로 선임될 당시에 어땠는지요…: 덕이 모자라 불행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 시점에 때가 그랬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노조나 그때 후배들을 개인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다.

· MBC노조 등 방송 노조의 활동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 요즘은 돌아가는 거 잘 모른다. 얼마전 기자협회 창립 29주년 행사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나도 일선기자 시절엔 열정이 있었다. 우리가 기자협회할 때는 장차의 노조를 지향했었다. 옛날의 나를 몰랐던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근황은 어떠신지요…: 친구들과 가끔 날을 정해 등산을 다닌다. 나도 마음은 젊다고 생각한다.

3. 최창봉 사장
(1989.2.10∼1993.3.18)

김영수사장 이후 MBC 위상정립 파동이 있었다. 노조를 포함한 사내의 노력과 여소야대 정국의 역학관계 덕분에 방송문화진흥회라는 공익재단의 대주주 방식으로 공영적인 MBC 체제가 성립되었다. 이후 사장으로 취임한 최창봉 사장은 "여러분의 홀로서기 투쟁의 결과로 구성된 방문진에서 사장으로 선임되어 이 자리에 섰다."고 취임사에서 말했다. 그러나 재임기간 동안 노사갈등이 심화되었고 파업, 해고, 파업 등의 노사대립이 이어졌다. 지난해 주총에서 연임되었으나 YS정부 출범후 올해 3월 사장직을 떠났다.

·근황은 어떠신지. 잘 지내시는지요…: 나는 잘 있다. 잘 있으니까…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십니까? : 글쎄 나는 잘 있다. 좋은 방송해야 한다. That`s all이다.

·이임식없이 떠나셔서… 방송현업인들에게 하실 말씀이라도… : 대한민국에서는 방송을 제대로 하기 어렵다. 방송인의 자각이 필요하다. 깨어있는 방송인이 돼야 한다.

·요즘 MBC의 방송내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TV는 잘 안 보는 편이다. 새로운 전파환경이 전개되고 있는데 잘 해주면 좋겠다.

·MBC노조에 대해 특별히 하시고 싶은 말씀이 계신지요: 노조? 노조에 대해서는 언급할 것이 없다.

Ⅱ. 전임 위원장

1. 정기평 ('87.12.9∼'89.3.13)

·87년 12월9일 새벽1시반 지하 1층 구내식당에서 결성된 노동조합 창립총회에서 위원장에 선출된 정기평위원장. 평소의 부드러운 성격으로 볼 때 의외의 일로 받아들여졌으나 그는 엄청난 돌파력으로 초창기의 노조를 궤도에 올려 놓았다. 그는 다음해 8월 단체협약에서 공정방송조항을 명문화하기 위해 방송사상 초유의 파업을 결행했고, 그 파업은 결국 황선필사장의 퇴진으로 이어졌다.

그는 이른바 관제사장 김영수사장의 출근저지투쟁에 이어 방송문화진흥회법 제정에 앞장서 오늘의 MBC위상을 정립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정기평위원장은 그 후 문화과학부, 국제부에서 조용히, 성실히 기자생활을 하다 작년 50일파업에서는 경찰난입 후 집행부가 구속된 상황에서 비대위원장직을 맡아 다시 맹활약을 보였다. 그래서 나온 별명은 '협상의 귀재'.

현재는 방콕특파원으로 발령받아 동남아 취재현장에서 동분서주하고 있다. 파업비디오 인터뷰에서 "국민들이 작년 파업때 보내준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현업에서 정진하자"는 요지의 메시지를 남긴 바 있다.

2. 강성주 ('89.3.14∼'90.5.16)

'89년 3월 2기 집행부를 맡은 강성주위원장은 그해 9월 3개 국장 추천제를 내걸고 MBC의 2차 파업투쟁을 단행했고, 끝내는 추천제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후 그는 '90년 4월 이른바 KBS 4월투쟁에 동조하기 위한 방송사상 초유의 동맹제작거부를 이끈 뒤 위원장을 물러났다.

외신부로 돌아온 그는 걸프전 직전, 이라크로 파견돼 생사를 건 취재로 명성을 날렸고 현재는 사회부에서 교통부 출입기자로 일하면서 얼마전 아시아나 여객기 추락사고 보도 때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다.

3. 안성일 ('90.5.17∼'92.1.30)

'90년 5월 집행부를 이어받은 안성일위원장은 당시 한반도를 휩쓴 공안정국의 와중에서 '90년 9월4일「PD수첩」불방에 항의하다 최창봉 사장에 의해 해고되는 비운을 맞았다.
해고 이후에도 꼿꼿함을 잃지 않고 의연함을 견지했던 그는 그해 12월 위원장직에 다시 출마 재선됨으로써 조합원들의 지지를 확인했다.

이후 회사측은 '해고의 효력을 다투는 자'를 위원장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이 와중에 노사는 극한대립으로 치달았다. 그는 대승적인 결단으로 노조를 살리기 위해 '92년 11월 집행부 일선에서 용퇴했지만 그의 존재는 노조원들의 가슴속에서 살아서 빛나고 있었다. 결국 그의 복직문제는 지난해 50일 파업의 가장 큰 정신적 배경이었고 파업과정에서 주요이슈로 등장했다. 올해 6월 2일 마침내 그의 복직이 이루어져 현재 사회부에서 검찰출입기자로 일하고 있다.

그는 최근 "문화방송 노동조합이 출범할 때 했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여러 차례의 파업을 통해 국민들에게 던진 메시지가 방송을 통해 전달한 메시지보다 더 방송인다운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부조리와 노예의식에 대한 끊임없는 거부, 그것이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라고 말했다.(「파업백서」, "옳지 않은 것을 거부하는 의무와 권리"에서)

4. 이완기 ('92.1.31∼'92.11.30)

지난해 2월에 어려운 결단으로 중임을 맡은 이완기 위원장 직무대행은 회사측의 대화 거부와 노조 와해 공작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특유의 강한 뚝심으로 언론노조사상 최장기 파업인 작년 가을 50일 파업투쟁을 이끌어 사회개혁운동의 전선에서 국민의 뜨거운 관심을 집중시키게 했다.

작년 10월 2월 경찰의 난입과 함께 노동쟁의법 등 위반으로 구속된 그는 100여일간 영어(囹圄)의 몸으로 있었으나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되었고, 그 이후 기술연구부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는 최근 지난해 파업을 회고하면서 "MBC노조의 50일 파업은 순간의 분노가 아닌 축적된 분노에서 오랜 기간 준비되고 예견된 당위의 파업이요 이성의 파업이다. 그러기에 당시 우린 주저하지도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우리는 두려워하지도 후회하지도 절망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승리에 대한 신념은 확고했다.(…)
파업은 끝났다. 그러나 언론민주화를 위한 투쟁의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그 투쟁은 더 어렵고 외로운 자기와의 싸움으로 우리 앞에 남아있다." (「파업백서」, "50일 파업투쟁의 의의와 전망")고 당시의 현재와 미래를 정리하고 있다.

지령 100호 기념 특집

문화노보 1993년 9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