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일보내기

이름검색

        HOME  

  Profile Photo 글마당 토론실 中國硏究 각종활동 게시판 자료실 사이버강의실

 Profile

 Photo

 글마당

 정길화칼럼

 취재제작기

언론비평 

 미셀러니

     토론실

 언론개혁

 현대사비평

中國硏究

 베이징통신

 중국이슈

 중국자료창

 포토차이나

각종활동

 방송노조활동

 PD연합회활동

자료실

클리핑뉴스

제작팀자료실

개인자료실

 시판

자유게시판

 방명록

  사이버강의실

 

 

23 11 통계카운터 보기   관리자 접속 --+
전체 (23)
지금그사람은 (10)
전예측시리즈 (5)
기타 (8)
Name   정길화
Subject   노래패 반주 변창립 조합원
일생에서 가장 기억되는 날이 언제인가?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기쁜 날, 슬픈 날 , 무언가를 성취한 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날, 처음으로 TV에 나온 날 혹은 노래방에서 99점을 받은 날…그러나 단언하건대 지난 1992년 가을 MBC파업투쟁의 도정에서 10월2일 경찰력이 난입한 날은 적어도 MBC조합원이면 쉬이 잊혀지지 않는 날일 것이다. 그렇다. 1992년 10월 2일 오후 3시다.

- 그날 검찰의 3차 구인이 있을 것이라는 풍문이 돌았다. 그러나 1,2차 구인에서 이를 물리친 조합원들은 사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조합원의 물리적 저지력을 믿은 게 아니라 경찰 대거투입과 같은 최악의 상황은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 게다가 당시 막후 진행중인 노사 교섭에서 무언가 성과가 나올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는 이내 처참하게 판가름났다.

파업 집회 내내 1층 민주의 터 앞쪽 , 왼쪽 기둥 근처에서 피아노로 노래반주를 맡았던 변창립 조합원(아나운서실). 그를 말하기 위해서는 아무해도 10월2일 그날에 대한 회고에서 시작해야 할 듯하다. 우리가 그날을, 그리고 그를 길이 기억해내야 하는 주요한 단서가 여기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 갑자기 상황이 격변하였다. 사복 체포조가 농성장을 에워싸고 일단의 병력들은 텔렌트 로비쪽 문으로 진입해 곧장 조합 사무실 내에 있던 집행부의 강제 구인에 들어갔던 것 같다. 조합원들은 조를 짜 집행부 사수에 나섰다. 스크럼을 짜고 노래를 부르고…어느 순간 사복조와 조합원들이 민주의 터 안에 가득 들어찼다. 구호와 노래소리가 커지고 치열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초동 단계에서 사무실내의 쟁대위 동지들은 거의 유린되었던 모양이다. 민주의 처에서 벌어진 육박전은 조합원들을 차단하고 잔류한 집행부를 수색해내기 위한 전초였을 것이다.

일대 아수라장이었다. 10월이면 더울 때는 아니다. 그러나 조합원들의 얼굴엔 땀이 비오듯 하고 옷이 뜯기고 깔판이 어지러이 날았다. 여자 조합원들의 울부짖는 비명, 사복 체포조의 고함… 어느 순간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만 눈에 들어왔다. 나는 처음에 피아노와 악기들을 지키려다가 마구잡이로 조합원들이 연행되어 가는 광경을 보고 나도 모르게 몸싸움에 끼어들었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이상한 일이다. 그 혼돈과 소란의 순간, 정적이 느껴졌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침묵은 공포스럽기조차 하였다. 낭패감과 절망의 와중에서 문득 지금 내가 할 일은 건반으로 가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격정 끝의 떨리는 손을 가다듬고 호흡을 가누는데 돌연 그 노래가 생각났다. ….파업기간 내내 한 번도 연주하지 않았던 그 노래가 그때 머리에 떠올랐다.

그 치열했던 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변창립 조합원의 목소리는 사뭇 떨렸다. 왜 안 그렇겠는가. 그날의 절망, 그날의 분노, 그날의 아픔, 그날의 사랑을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그날 그는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를 계속해서 반복하였다. 몸싸움이 거의 끝나고 많은 조합원이 닭장차에 실리고, 민주의 터에 남아 치떨리는 분노와 슬픔으로 오열하고 있는 조합원 중에서 구인 대상자를 색출하려 그들이 눈을 번뜩일 때, 민주의 터는 변창립 조합원이 연주하는 음악의 장중함으로 가득했다. 우리 승리하리라, 우리 승리하리라….

노래패와 반주팀이 와해된 상태에서 이선영 이보영 등의 여조합원이 북채를 쥐고 북이 찢어져라쳤다. "단결! 단결!"그리고 이용석 조합원이 노래를 불렀다. <누가 나에게 이 길을…> 변창립 조합원의 반주가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사람들이 울기 시작했다. 서로 어깨를 걸고 무릎을 찬바닥에 대고 노래를 부르며 절규하였다.

그날 변창립 조합원은 양천 경찰서에 연행되었다가 자정이 이슥할 무렵 훈방되었다.

- 사실 나로서도 영원히 잊지 못할 일이다. 대학시절 98년 서울의 봄때 어쩌다 시위에 참여한 적은 있었지만 (그는 연세대 영문과 78학번이다) 그 시절의 통과의례 정도일 뿐 대개의 MBC사원이 그렇듯 운동권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노래패의 멤버로 반주를 밭은 것도 인간 사슬(?)에 발목잡혀서 시작한 일이었고 따지고 보면 나처럼 투쟁가를 싫어했던 사람도 없다.

좋아하는 노래의 취향도 부드러운 경음악풍이다. <아드리느를 위한 발라드>쯤이 내게는 제격이다. 지금도 <철의 노동자>보다는 정태춘의 <북한강에서>가 좋다.

그렇다면 상황이 인물을 만드는 것인가. <여론광장>의 중계차 코너를 맡은 정의파 아나운서로 통하지만 원만한 인상의 호남형인 그의 얼굴에서 이 시대의 '비창(悲愴)'을 토해낼 것 같은 기미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방송을 하고 싶어 MBC를 택하고, 방송을 더 잘하고 싶어 노조에 가입하고, 그리고 그 울력 안에서 노조 정신의 감화, 방송민주화의 세례(洗禮)를 받고 오늘의 그가 되었다. 그 모습은 우리 조합원들 중에서 쉽사리 찾을 수 있는 여느 존재와 결코 다르지 않다.

- 이 자리에서 솔직하게 고백하는데 나는 악보도 볼 줄 모른다. 그냥 감으로 연주를 한다. 내가 정식으로 배운 피아노는 유치원 때 배운 체르니 30번까지가 전부다.

그의 「양심선언」에 또한번 놀란다. 이런 그에게서 유명한 성악가 마리안 앤더슨이 악보도 볼 줄 몰랐으면서도 신앙과 음악에 대한 사랑만으로 열정적인 노래가 가능했던 사실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은 필자의 과도한 상상력 탓일까. 이제 그도 돌아와 거울 앞에 섰다. 흔히 아나운서직은 불가피하게 파업의 전위에 서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불이익을 당하는 수가 많다고 한다. 이에 대한 그의 생각은 어떠할까.

- 조합 차원의 일에 조합원으로서 동참하였다. 다 똑같은 입장이다. 특별히 더 피해를 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선택한 일이었고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 문제에 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적은 없다.

파업이 끝나고 복귀한 이래 오랜 시간이 지났다. '92년 가을 투쟁'의 의미는 그에게 무엇인가. 그리고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지금은 태풍이 지난 뒤의 고요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평화로운 때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드러나지 않게 노조가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사람들이 좋다, 음악이 좋다", 그리고 "사람들이 좋다. 노조가 좋다" 이다. 조합의 일상 활동에서 그런 연대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누가 노래패 아니랄까봐 재빨리 덧붙인다.

- 벌금형 받은 동지들 문제가 처리된 이후에도 혹시 돈이 남으면 건반 좀 좋은 걸로 교체해 달라. 우리 꺼는 애들 장난감 수준이다. 음조나 사운드가 다양한 것으로 중고품이라도 좋으니 말이다.

게시물을 이메일로 보내기 프린트출력을 위한 화면보기
DATE: 2002.04.10 - 13:14
LAST UPDATE: 2002.11.23 - 11:14
Name   E-Mail   Password

 이전글 걸개그림 제작한 미술1부 조합원
 다음글 웃음속의 진지파 박정문 조합원
글남기기삭제하기수정하기답변달기전체 목록 보기

                                Copyright © JUNDPD.CO.KR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