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일보내기

이름검색

        HOME  

  Profile Photo 글마당 토론실 中國硏究 각종활동 게시판 자료실 사이버강의실

 Profile

 Photo

 글마당

 정길화칼럼

 취재제작기

언론비평 

 미셀러니

     토론실

 언론개혁

 현대사비평

中國硏究

 베이징통신

 중국이슈

 중국자료창

 포토차이나

각종활동

 방송노조활동

 PD연합회활동

자료실

클리핑뉴스

제작팀자료실

개인자료실

 시판

자유게시판

 방명록

  사이버강의실

 

 

23 11 통계카운터 보기   관리자 접속 --+
전체 (23)
지금그사람은 (10)
전예측시리즈 (5)
기타 (8)
Name   정길화
Subject   합숙 기도(企圖)까지 한  수송부 의리파 4인방
- 아마 김대중씨가 미국에서 돌아올 때였을 것입니다. 5공때 2.12 총선을 앞두고 있을 무렵이었을 겁니다. 취재차량을 운전해서 나갔던 수송부 직원이 혼비백산, 질겁을 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땡전뉴스」니 하며 이른바 편파, 불공정 보도가 한창일 때 아니겠습니까? 흥분한 시민들이 "MBC 너희들 뭐하러 왔냐"며 차를 마구 짓밟아 본네트니 상판이 형편없이 찌그러졌죠.

- 그뿐이 아닙니다. 국회의원 선거 때 그러니까 4.26 총선 때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중계차가 평민당사에 나갔었죠. 평민당 당원들이 MBC취재진들과 중계 스탭에게 거칠게 항의를 했고 이 통에 저희 동료 수송부 직원이 몰매를 맞는 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분은 그로 말미암아 병원신세까지 졌고 후유증을 오래도록 겪었습니다.

- 또 있습니다. 6.29 전 그러니깐 6.10 사태 때, 그걸 6월 항쟁이라고 그래야 맞습니까? 좌우간 명동성당에 나갔던 동료 한 사람도 차가 부서지고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꼴을 당했습니다. 기자나 PD가 취재와 제작일선에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우리들은 현장에서 가장 최후에 움직이는 사람들이지요. 그러다 보니 참으로 못볼 일, 못볼 꼴 많이 당했습니다.

수송관리부, 그 어떤 취재팀도 제작진도 이들의 노력없이 움직일 수 없다. 인원과 장비를 태우고 기동성있게 적시적절하게 현장으로 도착하게 하는 사람들, MBC의 발, MBC의 살아 움직이는 신경조직이 바로 수송관리부다.

그러나 너무나 당연하고 흔해서(?) 우리가 그 중요성을 간과하는 물처럼, 공기처럼 수송관리부 사원들의 노고는 그 노력만큼의 평가를 못받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노조에서도 마찬가지다. 집회 때 나서서 발언하는 적도 별로 없고, 집행부의 '요직'에서 활약하는 일도 없다. 노조원의 한 사람으로서 조합비를 내고 파업찬반투표에 참여하고 파업에 동참하여 집회장에 나와도 으레 그러려니 하며 별로 주목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합원 한 사람. 두 사람이 뭉쳐 조합의 단결을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현실적인 무게를 더하게 됨을 생각할 때 ,말 없는 다수, 건강한 다수로서 이들이 조합활동에 기여하는 공로를 과소평가할 수 있을까?

'지금 그 사람은...'의 일곱 번째 주인공으로 수송관리부 조합원이 등장하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각별하다. 오수천, 전병욱, 이용훈, 문기영 조합원(이상 주민등록번호순), 이 네 사람은 물처럼 공기처럼 파업의 현장에서 우리들에게 친근하였고 또 필요불가결하였다. 게다가 이들은 소속부서에서의 회유와 압력을 피하려 한때 여관 합숙까지 하며 파업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지기까지 하였다.

'지금 그 사람은...'에서 이들을 모시고 1992년 MBC 노동조합의 뜻을 음미하기에 앞서 노조활동에 동참하게 된 계기를 묻는 질문에 이구동성으로 답하는 것이 앞의 체험담이었던 것이다.

- 이러한 일들은 겪으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직종,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방송이라는 결과를 만들어 내는 곳이 방송사라고 하지만 사원들이 바깥에서 평가를 받고 대접을 받는 것은 프로그램에 달려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5공, 6공 시절 우리 방송, 특히 뉴스에 있어 공정방송이 안 되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그래서 국민들의 신뢰를 잃었기에 현장에서 그간 수모를 겪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일까. 현장에서 겪은 철저하고도 혹독한 이들의 경험은 노조운동의 필요성에 대한 절실한 인식으로 이어졌다. "작은 힘이라도 모아 좋은 방송, 공정방송을 이룩하고자 하는 노조 에 뜻을 보태고 싶었다."던 이들의 노조 가입동기는 순수하고 또 용기있는 일이었다. 중계차에 돌이 날아들고 취재차량의 창유리가 박살나는 현장에서 생명에 위협을 느낄 정도로 가열한 체험을 한 그들이 느낀 공정방송에 대한 간절한 바람은 무엇보다 자구적(自救的)인 안타까움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연장선에 1992년 가을 네 사람의 단단했던 의지가 꿋꿋이 서있다.

- 파업참가는 조합원으로서의 의무감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번에 노조 설문에서도 그런 내용이 있었습니다만 해고자 복직, 공정방송의 제도적 장치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조합의 존립을 위해 파업은 불가피하였다는 것이 우리가 느낀 생각이었습니다.

한때 1명을 빼고 모두 조합원인 시절이 있었던 수송관리부, 이런 저런 이유로 하나 둘씩 조합을 떠나고 92년 파업 직전에 73명중 35명이 조합원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 중에도 집회와 장외투쟁 거의 내내 조합원으로서 할 바를 견지하였던 네 사람이다. 이들의 진단과 분석은 정확하게 파업투쟁의 정곡을 찌르고 있다.

"아무리 운전대를 잡고 있어도 공정방송 어떤 것이고 왜 중요한 것인지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다"며 진솔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말하는 이들, 그러나 이들이 가는 길에 카페트가 깔리고 요란한 박수 갈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회사에서 발송한 협박조의 편지가 집으로 우송되고 무노무임조치가 거론될 때 누구보다 성실한 가장이자 생활인인 이들에게 죄어오는 부담과 압박은 자못 심각하였다.

- "아무리 정의가 좋고 공정방송이 옳아도 왜 굳이 힘들게 사느냐"고 가족들이 심각하게 걱정할 때 참으로 난처했습니다 .특히 "73명중, 혹은 35명중 하필 당신들 네 사람만 유난히 그러느냐"라고 할 땐 딱히 할 말이 없더군요.

- 그럴 때 할 수 있는 말은 달리 없었습니다. 나만 믿어라. 가장으로서 집안은 책임지겠다. 걱정하지 말라. 남자가 나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정당한 길을 가겠다는데 뭐라고 더 얘기할 게 있느냐...이것이 내가 말했던 전부였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보람 있고 떳떳한 결정이지만 그 당시 약간 불안했던 것은 사실이고 집사람을 비롯한 가족들은 상당히 떨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남편을 만류하기 위하여 단식을 한 부인도 있었습니다.

파업기간 중 이러한 분위기를 벗어나고 무시로 걸려오는 소속부서로부터의 전화공세를 피하고자 이들이 도모했던 방법이 바로 여관합숙. 그러나 이들의 기도는 부인들의 강력한 만류에 부딪혀 무산되었다.(한때 소문이 그렇게 나기도 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 비록 실현은 되지 않았다 해도 이러한 에피소드는 이들 의리파 네 사람의 확고하고 의연한 파업투쟁의 강도를 짐작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그 결과 파업의 훈장(?)으로 이들 중 이용훈 조합원은 정직 3개월의 중징계에 처하기도 하였다.

경찰이 난입하였을 때 "도둑맞는 기분"이 들었으며, "공정방송이 무너진다"는 느낌을 가졌다는 수송관리부 4인방 오수천, 전병국, 이용훈, 문기영 조합원.

그 아수라장에서 울분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던 이들은 MBC 사원의 귀중한 생명과 고가장비를 책임지는 그 고귀한 손으로 지금도 운전대를 잡고 있다. 이들의 한결같은 희망은 좋은 프로그램, 좋은 뉴스가 방송되는 것, 국민들로부터 돌팔매질이 아닌 박수를 받으며 가로수를 누비고 싶은 것은 이들의 소원만은 아닐 것이다.

문화방송노보 1993년 4월 23일

게시물을 이메일로 보내기 프린트출력을 위한 화면보기
DATE: 2002.04.10 - 13:17
Name   E-Mail   Password

 이전글 그날 뜨겁게 오열한 황외진 조합원
 다음글 <급소> PD수첩 할렐루야 사태 - " 졸속수습에 급급하였다"
글남기기삭제하기수정하기답변달기전체 목록 보기

                                Copyright © JUNDPD.CO.KR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