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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정길화
Subject   그날 그때의 순수함과 치열함으로
<"파업백서-민주방송 횃불되어" 편집후기>

파업 1년이 끝나는 시점에서 비로소 92년 MBC노조 파업을 정리하는 「파업 백서」를 내보낸다. 이러한 시간적 일치는 분명 의도했던 바는 아니다. 여건과 상황이 허락했다면 백서의 발간 시기는 좀더 당겨질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바로 지금 이 시점 - 파업의 외상(外傷)이 아물어져 가는 것처럼 보이고 파업에 대한 우리들의 기억도 스러지는 것만 같은 - 에 「파업백서」가 발간되는 것은 우리들의 묵은 상처를 되새기며 우리 자신의 자세를 새롭게 가다듬는 계기로 승화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오히려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그것이 다행스러운 것은 다른 데에 있지 않다. 오늘의 우리 모습을 잠깐만 살펴보면 알 일이다. 눈치보기와 알아서 기기를 극복하지 못하는 뉴스, 시청률 지상주의에 매몰되는 프로그램, 끊임없이 야기되는 직종 이기주의의 분출 등은 파업을 결행한 MBC노조원의 모습이라고 보기엔 자못 실망스런 점이 많다.

민주의 터를 메운 우리의 열기, KBS노조에서, 한강시민공원에서, 남산에서, 명동에서, 대학로에서... 가는 곳마다 사그러질줄 모르고 타올랐던 우리의 순수성은 어디로 갔는가.

더 이상 굴종의 삶을 살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분연히 민주방송의 횃불을 들고 일어섰었다. 해고 동지를 복직시키고, 공정방송의 제도적 장치를 세우고, 노조의 뼈대를 굳건히 하는 것이 한 개인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우리의 생업인 방송을 보다 신명나게 해나가는 길임을 우리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길이 사랑할 문화방송의 참된 발전을 가져오는 것임을 우리는 확신했다. 그 믿음으로 우리는 굳게 뭉쳤고 또 해냈었다.

그로부터 1년. 벌써 우리는 잊은 것인가. 그날의 울분, 그날의 고통을. 우리는 벌써 지친 것인가. 50일 파업으로 우리의 모든 정열과 노력을 쇠진하고 그저 현업과 일상으로 도피하려는 것은 아닌가.

이제 안성일, 김평호 동지도 복직하였다. 외견상 MBC노사 파행은 수습되었고 더 이상 '피흘릴' 일도 없어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지난 해 파업이 노조의 실체를 추스리기 위한 최후의 파업이었을지는 모르되 파업 투쟁에서 우리가 외친 공정방송, 방송민주화의 구호는 아직 공허한 메아리로 그치고 있다. 우리들은 혹시 두 사람의 '순교자'에 대한 채무감을 파업투쟁으로 변제하고 안일한 일상으로 파묻히려는 은밀한 유혹에 넘어가고자 하지는 않는가.

다시 지난 해 가을로 돌아가 보자. MBC파업은 우리들만의 일이 아니었다. 무수한 국민의 지원과 격려가 줄을 이었다. 신림동 떡아줌마, 탑골공원 노인회, 달걀을 삶아온 대학생들… 그들은 공정방송을 위해 파업한다는 MBC노조의 가열한 투쟁에 기꺼이 찬동하고 정성껏 그들의 마음을 보내주었다. 우리는 지금 과연 그들에게 진정으로 보답하고 있는가. 어설픈 자만으로 자족하거나 섣부른 자학으로 자포자기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파업백서-민주방송 횃불되어」는 일차적으로 지난 가을 MBC파업에 관한 기록의 총정리이지만 그보다는 파업투쟁에 투여되었던 우리의 건강성과 순수성을 되살리는 것에 더 큰 뜻을 두었다.

1부 「파업대장정」은 당시의 특보를 중심으로 편집했으며, 특히 파업의 불가피성과 정당성이 자연스업게 도출될 수 있도록 「파업전사(前史)」에 상당한 비중을 주었다. 2부 「기획논단」에서는 파업의 반성적 평가를 시도하면서 미래지향적인 전망과 앞으로의 방향성을 모색하는 논문을 수록하였다. 그러나 MBC노조원에 의한 글이 한 편도 게재되지 못한 것은 유감스런 일이다.

3부에서는 합의각서, 단체협약, 공정방송협의회 운영 규정 등의 전문을 수록하고 언노련 등 언론 단체의 특보와 일간신문의 기사를 정리했다. 이와 함께 회사측의 악의적인 제(諸) 선전물을 개별적인 논평없이 모두 망라해 실은 것은 치열했던 당시의 선전전을 살펴보게 하면서 나아가 도덕성에 있어 진정한 승자는 누구인가를 직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뜻이다.

지노위, 중노위 등의 중재관련자료와 공판 관련 자료는 다소 양이 많기는 하지만 자료적 가치가 높을 뿐 아니라 미결의 사안인 92년 MBC파업의 법적인 정리를 위해 꼭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가감없이 수록했다. 그리고 옥중 서신, 「지금 그 사람은...」, 사진 특집 등으로 구성된 4, 5부의 내용은 기억의 편린 속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줄 것이다.

요컨대 「파업백서-민주방송 횃불되어」는 92년 MBC노조파업의 치열했던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데에 그 뜻을 두었다. 진솔하고도 겸허한 마음으로 페이지마다 서린 그날 그때의 순수함을 회복하는 것이 이 백서의 진정한 발간 목적일 것이다. 백서가 발간됨에 따라 지난 7월 제작된 파업비디오와 함께 이로써 92년 MBC파업에 대한 기록 작업은 종결된다.

92년 MBC파업에 대한 평가와 의미 부여 작업은 연구자들의 몫이다. 반면 우리들 - 권력과 자본의 예속에서 독립해 공정방송과 방송민주화를 확보하기 위해 오늘도 온몸으로 달려가야 하는 문화방송의 방송노동자들 - 의 몫은 현장에서의 철저한 실천인 것이다. 또다시 방송인의 자율성이 배제된 채 권력의 자의(恣意)와 방송 모리배들의 탐욕에 의해 방송구조개편이 논의되는 이 시점에서, 이러한 실천은 시급하고도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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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2.04.10 -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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