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최고의 권위는 도덕성. 권위를 잃은 방송위원회는 즉각 개편돼야.
이      름: 정길화
작성일자: 2002.04.09 - 18:15
지하철 파업 당시 우리 방송이 보인 행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재론하지 않겠다. 차마 언론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편파 보도의 극치를 보여 마침내 사과방송을 하기에 이른 경우도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 지하철 파업 보도와 관련해 제기된 불공정 시비의 경우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우리 방송이 종래에 고질적으로 가지고 있던 반노동자적 시각에다 더해 현 정권이 원하는 바대로 알아서 간 측면이 있다는 점이다. 국정홍보처를 신설해 사실상의 공보처를 부활시킬 정도로 홍보를 절실히 원하는 현 정권에 우리 방송은 진실 보도를 외면한 채 노조 죽이기로 '화답'했다.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래도 공정한 보도로 최선을 다하고자 했던 많은 현업방송인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보다 나은 내일의 방송이 있을 것을 기대한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이토록 편파 불공정 파문이 들끓었음에도 이에 대한 심의의 권한과 의무를 가진 방송위원회가 이를 철저히 방관했음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방송 프로그램의 온갖 사안들, 심지어 방송현업인이 납득할 수 없는 내용에까지 각종 제재를 내리던 방송위원회가 지하철 파업보도의 불공정성에 대해서는 꿀먹은 벙어리가 된 것이다.

사실 그동안 방송위원회의 심의는 불구(不具) 상태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제작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추상(秋霜)과 같다가도, 일정한 가치판단을 내려야 하고 그럼으로써 정치적 부담이 있는 보도 분야에 관해서는 거의 직무를 유기해 왔다. 기껏 피해자 신원 공개나 피의 사실 공표 같은 기계적인 부분에만 심의의 칼을 휘둘렀을 뿐 선거보도의 공정성이나 이른바 북풍, 총풍 등의 주요 사안에 대해서는 침묵해 왔던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단적으로 지난 대선 당시 논란이 됐던 '사상검증 토론회'와 관련해 방송위원회가 한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 잘 알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방송위원회가 행한 모든 심의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이번 지하철 파업 보도와 관련해 방송위원회가 보인 작태는 우리 현업 방송인을 분노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이러한 일이 근본적으로는 기존 방송위원회의 잘못된 구성방식이 빚어낸 구조적인 문제로 진단한다. 이렇다할 검증 장치나 인사 청문회와 같은 과정없이 정치적 안배에 의해 인선된 것으로 보여지는 현재의 방송위원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가 이번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이로써 방송위원들을 구성할 때 적절한 검증이 있어야 한다는 시민언론단체의 주장이 재삼 입증됐다고 하겠다.

그런데 작금의 우리 방송계는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 잘못된 구성과 함량미달의 자질, 책임소재의 문제 등으로 볼 때 현재의 방송위원들을 개편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졌다. 하지만 형식논리상 통합방송법이 제정될 때까지 이들의 자리는 보장된다. 그러나 또다시 기약없는 통합방송법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방송계에 시간이 많지 않다. 사실 방송위원들에게 염치가 있다면 지난해 이래 이런저런 사정으로 방송법의 개정이 지연되고 있을 때 스스로 늠연히 입장을 정리하는 것이 올바른 처신이었다. 알량한 미련으로 좌고우면하다가 구차한 지경에 놓여 결국 체신만 잃게 됐음에 일말의 안타까움마저 느끼게 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구 정권 하에서 기용된 방송위원들은 더 늦기 전에 용퇴함으로써 더 이상의 사태 악화를 막아야 한다. 이미 규제기구로서의 위엄과 도덕성이 실추될 대로 실추된 바 그런 이즈러진 권위로 무슨 심의를 더 하겠단 말인가. 나아가 방송위원들의 사퇴가 이루어지면 "KBS는 국영방송 같은 성격이 있기 때문에 그런 방송을 해도 괜찮다"는 식의 발언으로 이번에 문제가 된 보도교양심의위원회를 비롯한 각 분과 심의위원회 또한 당연히 개편돼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통합방송법의 제정 과정을 더욱 면밀히 주시함으로써 이번 사태에서 드러난 교훈을 결코 허투로 넘기지 않을 것이다. 특히 방송위원회 위원중의 절대다수를 현 정권이 장악할 수도 있는 기존 여당안의 문제점이 어떻게 해소되는지를 부릅뜬 눈으로 감시할 것이며, 인사청문회 등의 검증장치 또한 반드시 쟁취해낼 것이다. 개혁성과 전문성을 갖춘 인사 중에서 엄정한 평가를 통해 방송위원을 선정하는 것은 방송개혁을 실현하는 첫단추로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1999. 5. 6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