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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지니
Subject   <실록 민주화 운동> 학림사건
[실록 민주화 운동] 46. 학림사건

온몸을 발가벗겨서 ‘칠성판’ 위에 묶어놓은 채 몽둥이로 때리고, 목욕탕에 집어넣어 물고문하고, 견디다 못해 똥물까지 토하고 기절하면 냉수를 끼얹어 깨어나게 한 후 또 이어 전기고문하고, 그야말로 고문의 연속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도대체 짐작도 되지 않고 그저 방안 가득 붉은 전등불빛만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그러나 이태복(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함께 만든 학생조직에 대해 불라며 가해지는 지독한 고문 속에서도 이선근(현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장)의 머리는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이 자들이 그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또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이선근이 전국민주학생연맹(전민학련) 조직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 서울의 봄이 실패로 끝난 직후였다. 이선근이 생각하기에 80년 서울의 봄이 실패로 끝난 것은 당시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한나라당 의원)과 그 배후인 서울대 이념서클 한국사회연구회(한사)의 김병곤(작고) 등이 근본적으로 군부에 맞서 철저히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군부 등장의 빌미가 된다고 해서 5월15일 서울역에서 회군을 결정했으나 그것과 상관없이 전두환 일파는 이미 권력을 찬탈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군부의 권력 찬탈을 막기 위해서는 시민과 더불어 철저히 싸우는 길밖에 없었다. 그런데 당시 학생운동 지도부는 군부에게 등을 보이고 만 것이다.


비록 서울의 봄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으나, 군부가 자행한 광주 학살은 국민 대중의 가슴 속에 풀릴 수 없는 분노로 응어리져 있었다. 만일 그 분노에 불을 붙일 수만 있다면 전두환 일파를 물리치는 것이 어렵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군부독재에 대한 철저한 항전 의지로 무장된 새로운 학생운동 조직이 필요했다.


이선근은 새로운 학생운동 조직에 관해 흥사단아카데미(아카데미) 선배인 이태복과 의논했다. 도서출판 광민사 사장이었던 이태복은 평소 학생운동은 문제제기 집단으로서 끊임없는 정치투쟁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고 노동운동이 그 성과를 받아 역량 강화에 힘쓰면서 궁극적으로 문제해결 집단으로 자리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선근과 이태복은 이와같은 데 인식을 같이하고 새로운 학생운동 조직을 건설하는 데 이선근이 주도적으로 나서고 이태복은 중요 사항만 관여하기로 대략적인 합의를 보았다. 80년 9월쯤의 일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학생운동 조직의 건설이 생각처럼 진행되지는 않았다. 학생운동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서울대는 나중에 무림(霧林)이라고 불리는 ‘한사’를 중심으로 한 소위 언더 지도부들이 굳건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조직 보호와 노동현장 진입을 명분으로 삼아 학생대중의 거듭되는 투쟁 요구를 외면하고 있었다.


이선근이 새로운 학생운동 조직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언더 지도부의 영향력부터 약화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일환으로 먼저 5월15일 서울역 회군의 책임문제를 제기했다. 곧 양 진영 사이에서는 즉각적인 투쟁이냐, 아니면 장기적인 준비냐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진행됐다. 그 과정에서 양측의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만 갔다. 이선근은 무림세력과의 논쟁이 더이상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자신이 몸담아 왔던 대학간 연합서클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조직 건설에 나섰다.


81년 2월27일 마침내 전민학련이 결성됐다. 전민학련은 회칙 전문에서 “학원의 자유와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한국 민주주의의 보루로서 기만과 폭력에 가득찬 현 정권의 위기를 심화시켜 민주화의 열기를 불태울 것”을 다짐하면서 최고기관으로 중앙위원회를 두고 그 산하에 도급 단위에는 지부를, 그 밑에 지역별로 지회를, 그리고 대학별로 지반을 두었다. 중앙위원회는 발기인으로 참여한 이선근, 박문식(공인회계사), 박성현(IT기업 경영) 등으로 구성됐다. 조직은 철저히 하부 조직이 상부나 동급 조직의 존재를 알지 못하게 하는 비밀주의 방식으로 운영됐다. 이는 군사독재의 탄압으로부터 조직을 보호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그리고 회원들에게는 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일체의 합법·반합법·비합법 투쟁에 헌신하고 조직의 결정을 충실하게 수행해야 할 의무가 부과됐다. 요컨대 전민학련은 군사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이룩하기 위해 학생들이 주축이 돼 만든 비합법 지하조직이었던 셈이다. 80년 서울의 봄의 좌절과 광주에서의 피비린내 나는 항쟁이 학생들을 직업적인 투사로 나서게 한 것이다.


전민학련은 결성과 동시에 조직 확산에 노력하면서 81년 봄의 학원 시위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무림사건으로 학생운동을 완전히 소탕했다고 생각했던 군사독재는 연이은 학원가의 시위에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대에서 3월19일 첫 시위가 발생한 이래 5월 중순까지 성균관대·부산대·동국대 등에서 모두 8차례의 학생 시위가 전민학련의 지도 아래 일어났다. 그리고 이 사태는 5월27일 서울대 시위 도중 김태훈이 “전두환 물러가라”고 외치며 도서관 6층에서 투신 자살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학원가는 긴장에 휩싸였다. 그리고 학원사태는 마침내 국회에서 정치문제로까지 비화됐다.


이태복과 이선근이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되어 간 것은 그 직후인 6월10일쯤이었다. 본인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미 경찰은 이태복과 이선근의 움직임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다. 단서는 79년 가을 경찰에 검거된 남민전 사건에서 나왔다. 남민전 관련자들이 각 사회운동 세력들에 대해 조사 분석해 놓은 보고서가 고스란히 경찰의 손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 보고서에는 이태복을 비롯한 아카데미 관련자들의 움직임이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


은밀히 내사하던 경찰의 눈에 이태복과 그 주변 인물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포착되면서 경찰은 본격적으로 수사를 진행했다. 그들은 이태복이 근무하는 광민사 아래층에 한 달 동안 사무실까지 얻어놓고 미행과 도청에 나섰다. 사건 전모를 파악한 경찰은 학원사태가 심각한 정치문제로까지 번지자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일제 검거에 착수했다. 이리하여 전민학련과 이태복이 중심이 돼 만든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 사건의 진상이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전민학련과 전민노련 관련으로 구속된 사람은 무려 30명에 달했다. 검찰은 그 중 전민학련을 따로 떼어 반국가단체로 규정했다. 전민학련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는 것은 법률적으로 무리였다. 전민학련의 규약 어디에도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목적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 그러나 군사독재는 또다시 이와 유사한 비합법 지하 민주화운동 단체가 출현할까 두려워 억지로 전민학련을 반국가단체에 끼워 맞췄다.


구체적인 물증은 아무 데도 없었다. 오직 관련자들이 서로 나누었다는 대화 내용만이 유일한 증거였다. 그러자니 필연적으로 혹독한 고문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의 한 얼굴 없는 고문기술자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몰랐지만 그런 사람이 있어 고문만을 전담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의 이름이 이근안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김근태 고문사건이 있고 난 후의 일이었다.


이 사건으로 이태복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이선근과 박문식은 각각 징역 7년, 5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들이 가혹한 처벌을 각오하고 온몸으로 보여준 용기는 이 나라 민주주의 발전에 실로 귀중한 밑거름이 됐다. 광주에서 끔찍한 살육이 자행된 후 모든 민주세력이 공포에 휩싸여 숨조차 쉬지 못하고 있을 때 이들이 보여준 치열한 투쟁정신은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또다시 전선에 설 용기를 갖게 했다. 적어도 학생들만큼은 이제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일어나 광주의 피맺힌 영혼들의 울부짖음을 온세상에 큰 소리로 전하기 시작했다. 광주 영령들이 젊은 학생들 속에서 다시 부활한 것이다.


사건이 종결된 후 경찰은 전민학련 사건을 이름짓기를 ‘학림(學林)’이라고 했다. 학생(學)들의 조직(林)이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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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4.03.29 -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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