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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지니
Subject   [실록 민주화 운동] 54. 부산의 민주화 운동
[실록민주화운동]54. 부산의 민주화운동

1981년 민주화운동 핵심인사 22명이 용공혐의로 구속된 부림사건. 80년대 부산의 민주화운동은 이 사건을 빼놓고는 얘기가 불가능하다. 평범한 변호사였던 노무현이 변호를 맡으면서 민주화운동에 눈을 뜨고 마침내 대통령까지 됐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의미가 있는 사건이다. 이후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을 거치면서 부산의 민주화운동은 상당기간 침체기를 거친다. 85년 야당의 총선 압승. 명실상부한 부산지역 민주인사들 총결집. 민주화운동의 구심체로 ‘부민협’ 결성. 87년 박종철 고문 치사. 학생, 노동자들과 연계. 6월항쟁을 주도한다.


마침내 6·29선언. 역사의 물줄기는 지나갔어도, 그때의 열정은 여전히 생생하다.


2002년 12월19일 밤,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을 확인하는 순간 김재규(현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의 머리 속에는 온갖 상념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1969년 3선개헌 반대운동부터 시작해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일, 79년 박정희 독재를 무너뜨린 부·마항쟁, 81년 부림사건으로 구속돼 온갖 고초를 겪은 일과 변호사 노무현과의 만남, 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의 출범, 그리고 6월항쟁, 노태우의 당선, 한나라당 아성이 돼버린 부산….


설마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정녕 그 날이 오고야 만 것이다. 김재규의 눈에서는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쏟아질 뿐이었다.


81년 9월에 발생한 이른바 부림사건은 김재규 개인뿐만 아니라, 부산지역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큰 사건이었다. 무려 22명이 구속된 사건규모 면에서나, 이후 이 사건 관계자들이 모두 부산 민주화운동의 핵심으로 활동한 역사적 맥락에서도 80년대 부산의 민주화운동은 부림사건을 빼놓고는 서술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우연한 계기로 이 사건의 변호를 맡은, 요트 타기를 즐겨하는 평범한 변호사 노무현이 민주화운동에 눈을 뜨고,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대변자가 돼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의미에서 이 나라 전체 역사에서도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부림사건은 공주의 금강회 사건, 대전 아람회 사건처럼 전두환 정권이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용공조작극이었다.


81년 4월과 6월에 부산대에서 학생 시위가 발생했다. 경찰은 이 사건의 배후로 이호철(전 청와대 민정비서관)을 지목했으나, 이호철이 서울로 피신하면서 수사는 소강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81년 6월에 발생한 전민학련·전민노련 사건(이른바 학림사건)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이호철 등이 관련돼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전두환 정권은 아예 이번 기회에 부산지역 민주세력을 뿌리째 뽑을 작정을 한다.


이어 79년 부·마항쟁으로 구속됐다가 이듬해 10·26으로 석방된 사람들과 양서협동조합 관계자들이 대거 연행되기 시작했다. 이들의 혐의는 ‘반국가단체를 고무·찬양했다는 것’과 ‘현저히 사회적 불안을 야기할 우려가 있는 집회를 개최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근거는 끼리끼리 모여 시국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것이 전부였다. 당연히 수사관들은 극심한 고문을 가했다. 자신이 공산주의자라는 자술서를 쓰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마치 전기구이집에 매달린 통닭처럼 온몸을 묶어 매달아 놓고 사정없이 매질하는 소위 통닭구이 고문까지 자행했다. 허위 자백을 근거로 검찰은 이들을 국가보안법 및 집시법 위반으로 기소했고, 법원은 징역 6년까지의 중형을 선고했다.


이 사건으로 부산의 민주세력은 거의 와해되다시피 했다. 평범한 변호사였던 노무현은 문재인(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소개로 이 사건의 변호를 맡게 됐다. 그는 이들에게 가해진 끔찍한 고문에 놀랐고, 또 이들이 보인 민주주의에 대한 순수한 열정에 다시 한번 놀랐다. 이후 민주화운동은 노무현의 삶의 중요한 부분이 됐다.


82년 3월에 일어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으로 부산의 민주화운동은 더욱 침체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83년 12월 정부가 제적생들의 복교 허용 등 일련의 유화조치를 발표하면서 다시 전열을 재정비하기 시작한다.


84년 6월 신부 손덕만·송기인 등이 중심이 돼 공해문제연구소를 설립했다. 공해문제연구소는 ‘낙동강 하구언 반대’ ‘하단어민 피해 탄원’ 등 표면적으로는 환경문제를 주로 제기했으나 실상은 부산지역 민주세력의 사랑방이었다.


부산 민주세력들은 부림사건을 교훈 삼아 바로 공개적인 민주화운동 단체를 띄우기보다는 우선 비정치적인 단체를 결성해 분위기를 조성한 후 여건이 성숙되는 것을 기다려 공개적인 민주화운동 단체를 조직할 생각이었다.


85년 2·12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압승하면서 전국적으로 민주화 열기가 달아오르자 85년 5월3일 부산민주시민협의회(부민협)가 결성됐다. 부민협에는 송기인·손덕만 등 가톨릭 신부와 중부교회 목사 최성묵, 소설가 김정한, 변호사 김광일·노무현·문재인 등이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김재규·이호철 등이 실무진을 구성했다.


이들의 면면으로 볼 때 부민협은 명실상부한 부산지역 민주인사들의 총결집체였으며 이후 부민협은 부산지역 민주화운동의 공개적인 구심체로서 활동했다. 이들은 비록 광주나 대구·인천 등 다른 지역보다 조직 결성이 늦었으나 부림사건을 교훈삼아 상호간의 연대와 통일에 힘써 탄탄한 조직 기반을 자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민협의 활동은 처음부터 정권의 조직적인 방해에 부딪혀 난항을 거듭했다. 5월3일 오후 7시 부산 YMCA 1층 강당에서 갖기로 했던 창립총회는 경찰의 원천봉쇄와 행사장 난입으로 인해 난장판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송기인·노무현·이호철 등이 파출소에 불법 감금되기도 했다.


이후 시련은 계속됐다. 이들의 활동은 항상 당국의 감시 대상이었다. 부민협이 개최하는 각종 집회는 원천봉쇄됐다. 유인물은 빼앗기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부민협의 활동은 그칠 줄 몰랐다. 85년 말 총회에서 세 가지 방침이 결정됐다. 첫째 군사독재와 외세에 타격을 주는 광범한 정치폭로와 선전 및 시위를 추구하고, 둘째 부산지역의 여타 운동세력과의 연대를 통한 투쟁역량을 강화하며, 셋째 회원 역량의 확대와 체계화를 통해 조직력을 배양하고 회원 만남의 장과 수련회 등을 통한 회원 교육으로 회원들의 인식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87년 1월14일 발생한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은 민주화운동의 분수령이었다. 젊은 학생을 물고문해 죽게 하고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는 해괴망측한 거짓말에 부산 시민은 분노했다. 부민협은 2월7일 박종철의 추도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경찰은 시민들의 출입을 막고 집회를 원천봉쇄했다. 오후 1시55분 부민협의 노무현·문재인·김재규 등은 남포동 부산극장 앞에서 초조하게 오후 2시를 기다렸다. 2시가 되면서 대각사 등지에서 경찰과 숨바꼭질하며 산발적인 시위를 벌이던 군중 300여명이 부산극장 앞으로 몰려들었다.


이윽고 이날 시위를 주동하기로 돼 있던 김재규가 마이크를 들고 나섰다. “도대체 죽은 사람 추모제도 못하게 하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 이제부터 여기서 추도식을 거행하겠다.” 연설 도중 우레 같은 박수가 쏟아져 나오고 ‘타는 목마름으로’ 등의 노래가 불려지면서 분위기는 점점 고조됐다.


뒤이어 노무현이 등장해 연설하려고 할 때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해산을 시도했다. 추모객들은 즉각 시위대열로 바뀌었다. 충무로에서 시청으로 이어지는 간선도로를 꽉 메운 1만여명의 시위대는 ‘독재 타도’ ‘고문 추방’ 등의 구호를 외쳤다. 79년 부·마항쟁 이후 최대의 시위였다.


이날 이후 김재규는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아는 사람의 집을 전전하며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던 김재규는 산꼭대기 판잣집 단칸방의 부민협 회원 집에서 보냈던 3월의 어느 날 밤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바람이 씽씽 불어 판잣집 문이 덜컹대는 속에서도 밤새워 가며 나라의 민주화를 논했던 그날 밤의 그 열정. 그 열정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서 6월항쟁의 불길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87년 6월10일부터 6·29선언이 발표된 29일까지 부산지역에서는 연일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부민협은 5월20일 이미 ‘호헌반대 민주헌법쟁취 범국민운동 부산본부’를 결성하는 데 주도적으로 관여함은 물론 학생·노동자들과 연계해 각종 시위를 이끌었다. 모두가 신이 들린 듯 뛰어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6·29선언이 발표됐다.


이제 80년대 민주화운동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갈 것이다. 그러나 그 때의 그 열정을 김재규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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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4.05.25 -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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