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자 그러면 단속 시작합니다"  「인간시대」 실수담
이      름: 정길화
작성일자: 2002.03.20 - 11:20
<인간시대>의 핵심은 주인공의 진솔한 내면세계를 탐구하고 추출해 내는 데에 있다. 8년여 동안 이 프로그램을 장수시킨 비결은 아마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보다 좋은 모습, 보다 깨끗한 얼굴로 카메라 앞에 나서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네의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그러한 가식과 위선으로는 영악한(?) 시청자의 가슴에 다가서기가 도무지 힘든 일이므로 제작진들은 어떻게 해서든 주인공의 본 모습을 끌어내려 애쓰게 된다. 흔히 '무장해제'니 '무연출의 연출'이니 하는 말로 일컬어지는 <인간시대> 특유의 제작 기법이 이것이다. 연출자들은 바로 이 노하우의 개발에 절치부심하게 되고 현장에서는 그 성과에 따라 울고 웃는다.

연전의 어느 주인공은 노점상을 직업으로 하고 있었다. 단속반과 숨바꼭질을 하면서 살아가는 도시빈민의 인생유전을 다루어 보고자 하는 것에 기획의도가 있었는데 정작 촬영에 들어가니 그토록 빈번하던 노점상 단속이 보이지조차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시대>에 대한 사람들의 애정과 관심은 각별하다. 그리고 프로그램에 대하여 쏟는 호의는 그 주인공에게 고스란히 옮겨진다. 그러니 TV카메라가 왔다갔다 하기만 해도 몰인정한 단속반의 서슬퍼런 행차가 자제될텐데 항차 <인간시대>라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렇게 되면 애가 타는 것은 연출자다. 쫓고 쫓기는 일체 단속의 와중에서 주인공의 적나란한 실상과 솔직한 심성의 면모를 읽어내야 하는데 그 기회가 원천봉쇄되고 있으니 낭패다. 기다리다 못한 연출자가 고육지책을 생각해 낸다. 출연자를 흔들기 위해서는 그의 외곽을 때려라! <인간시대> 노하우중의 하나이다. 본인 모르게 단속반에게 부탁하여 실상황의 노점상 단속을 설정하는 것이다(흔하지 않지만 드물지 않게<인간시대>에서는 이러한 수법을 쓸 때가 있다.)

"원래 저 자리는 노점상 금지구역이죠? 게다가 지금 단속 기간 아닙니까? 저희들 말씀 때문에 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이건 실상황입니다. 임무 수행하시라구요!" 몇번이고 담당자에게 다짐을 한다. '평소대로', '원래대로'를 수차례 강조하지만 그래도 마음이 안 놓인다. 노파심으로 <인간시대>팀이 자신에게 부탁하였다는 말은 제발 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가 문득 도둑(?)이 제발 저리는 것 같아 그 정도면 알아서 하겠지 하고 그만 둔다.

카메라는 주인공이 모르는 위치로 숨고 몰래 촬영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몰래 카메라의 기원은 <인간시대>라고 하는 설도 있다). 상황 큐! 그러나 이게 웬 일인가. 주인공이 차고있는 와이어리스 마이크를 통하여 들어오는 단속반 담당자님의 말씀. "어이 수고하십니다. 지금 말이죠. <인간시대>팀이 날더러 당신 단속 좀 하라고 그러니까 내가 좀 심하게 하더라도 이해하쇼. 자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들으나마나다. 출연자는 어안이 벙벙하다가 이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고 우리의 순진한 단속반원께서는 상황이 NG인지도 모르고 길길이 오버액션을 하신다. 게임 이즈 오버다.

단속반 담당자에게 좀더 확실한 당부와 연기지도(?)를 하지 않은 것이 이 경우 실수라면 실수인 셈이다. 이러한 미묘한 상황에서 연출자는 어느 한쪽을 결정하고 판단해야하고 그 결과에 따라 일희일비하게 된다. 연출상황이 뜻대로 안되면 다음 장치를 또 생각해야한다.

자신의 이쁘고 잘난 모습,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대목만을 보여주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은폐하고 통제하려는 출연자와 좀더 그 사람의 숨어있는 모습을 보기 위해 옷을 벗기려는 연출자와의 집요한 싸움은 촬영기간 내내 계속 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화해의 악수를 청한 뒤 연출자는 전리품(촬영 테이프)을 안고 돌아온다. 그리고 이리저리 닦고 조이고 기름쳐서 방송을 낸다. 쏟아지는 질책과 비난! "주인공의 실체를 좀더 파고 들었어야지. 그게 뭐야…" 운운.

맥이 빠진 PD가 중얼거린다. "애초 저 사람을 주인공으로 잡은 것이 나의 최대의 실수였어."

TV저널 '나의 실수' 1992.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