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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정길화
Subject   동토에 떨군 한 알의 밀알 - 「PD수첩」 "조총련의 오늘" 제작기
극과 극의 시청자 반응

조총련민족학교를 국내 언론사상 최초로 공식 취재하고 돌아왔던 지난 95년 중순. 나는 상당히 고무돼 있었다.

"정길화 PD, 이거 완전히 특종했구만, 특종상은 물론이고평가상 감이야."

"그런데 그 사람들(조총련 사람들)무슨 마음으로 제작진을 받아들였지? 뭐 수상한 기색은 없었어? 그 사람들 선전선동술이 대단하다는데 말려들면 안 돼!"

오며가며 마주친 주변 사람들은 크나큰 격려와 기대 혹은 시샘(?)으로 과분한 관심을 표명해 주었고, 솔직히 나로서도 <인간시대>연출 당시 탤런트 최진실을 주인공으로 제작하던 때 이래로는 거의 초유의 주목에 자못 상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금단의 벽, 금기의 벽으로 간주되던 조총련이 그 조직을 유지하는 토대로 삼았던 민족학교를 초급학교에서 중급, 고급학교까지 일습으로 취재를 하다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람!


그 동안 기껏해야 몰래 카메라식 아니면 우격다짐식으로 취재를 하고서는 조총련 민족학교의 실체를 보여준 양 포장했던 것이 과거 조총련 관련 프로그램(또는 뉴스)의 실상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정식으로 보무도 당당히 학교 정문으로 들어가 대한민국 MBC담당PD임을 밝히며 "나는 서울에서 왔지 평양에서 온 사람이 아니다. 당신들 만세 불러주러 오지는 않았다. 다만 공과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겠다"고 호기까지 부려가며 (속으로는 적잖이 긴장했던 주제에!)취재를 마쳤으니, 주변의 부추김이 아니더라도 짜장 어깨에 힘이 들어갈 만도 했다.

그러나 프로그램이 방송된 직후에 나온 반응들은 나를 적잖이 당황케 만들었다.

"야 이**들아, 왜 빨갱이 조총련을 미화하는 거야"라며 방송도중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호통을 쳤던 익명의 다수들. 같은 프로그램을 놓고 오히려"당신네들은 역사의식도 없소? 조총련 얘기만 나오면 왜 그렇게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요? 자꾸 냉전적 시각으로만 보면 되겠소?"라던 뜻밖의(?) 사람들. 나를 정작 난감하게 했던 것은 바로 그런 극과 극의 시청자 반응이었다.

일제 식민지배와 민족 분단이라는 역사적 아픔이 극복되지 않은 채 도리어 확대 재생산 되고 있는 재일 동포 사회의 한쪽인 조총련을 민족동질성의 측면에서 바라보고자 했던 순수한 의도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1995년의 현실에 적잖이 낙담한 것도 사실이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 나는 얼마쯤은 뿌듯하고 기쁘다. 아전인수에다 자화자찬이라고 하겠지만, 올해 8.15특집으로 SBS에서 방영한 <조총련 사람들>을 보며 이태 전에 내가 했던 고민들이 전혀 덧없는 것만은 아니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냉전시대의 대립적 시각에서 벗어나 조총련 동포가 갖는 특별한 위치를 있는 그대로 보고자 했던 「조총련의 오늘」이 추구했던 정신이 <조총련 사람들>에서 도도히 들러가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어쩌면 이 글은 경직된 사고의 동토(凍土)에 너무 빨리 날아와 얼어 죽였던 한 마리 제비가 땅에 떨어져 한 알의 밀알이 된 저간의 사정을 찬찬히 되짚어보는 작업이기도 할 것이다.

꼬리를 무는 두가지 의문

'조총련'하면 무엇부터 떠오르는가? 북조선, 북송 교포, 문세광. 치마저고리 사건, 뭐 그런 것일 게다. 여기서 진도를 더 나가면 대남적화를 위한 일본내 전진기지, 간첩 파견의 교두보, 한덕수를 중심으로 한 치열한 권력다툼......뭐 이런 것들이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

지난 시절의 반공교육과 제도권 매체의 냉전적 보도에서 기인되는 이러한 연상작용은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건, 그러한 것들이 사실과 다르거나 또는 거리가 멀다는 확증 역시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앞서 말한 정도는 조총련에 관한 한국인의 평균인식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더욱이 북한 주석 김일성 사후 조총련은 불가촉의 위험집단으로서 곧 와해될 집합체라고 규정짓는 데는 별로 어려움이 없다.

조총련에 대한 나의 문제의식은 바로 여기로부터 출발됐다. 당시 취재과정에서 비로소 안 사실이지만, 재일동포 1세의 경우 90%이상이 남한지역이 고향이며, 따라서 조총련계 동포 또한 지역 연고가 대부분 남한이었다. 막연히 재일동포 중 북한 연고자는 조총련으로, 남한 연고자는 민단으로 속하게 되었겠거니 했던 나의 무지에 놀랐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의문은 고향이 남한인 사람들이 뭐가 아쉬워서(?) 조총련에 '가담'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의문은 곧장 조총련은 곧 망할 것처럼 보이는데 지금껏 남아 있는 사람은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일까 하는 데로 이어졌다.

여기서 잠깐 재일동포 사회 형성의 역사적 과정을 돌아보기로 하자.

일본내 한국인의 이주는 한일합방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자유도항기(自由渡航期)'로 불리는 이 시기엔 소수의 유학생과 일단의 노동자들이 일본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관동대지진 이후의 '도항저지기(渡航沮止期:일본 경제의 만성적 공황으로 실업자가 증가하자 한인 노동자들의 유입을 저지)와, 재일동포 1세의 대종을 이루는 한국인 대량 이주가 있었던 중일전쟁 이후부터의 '강제연행기'(强制連行期)를 거치게 된다. 2차대전 종전, 즉 일본 패망 직후 일본에 남아 있던 한국인의 수는 2백만명으로 추산된다. 이들 중 1백 50여 만명이 한반도로 귀환하고, 귀한 수송이 끝나는 1946년12월 이후에 50여 만명이 일본에 잔류하게 되니, 이시기가 '귀환잔재기'(歸還殘滓期)에 해당한다.

46년 3월 연합군사령부가 재일 한국인 중 귀환 희망자를 등록하게 했을 때 당시, 재일 한국인 등록자는 65만명으로 집계됐다. 그중 남한으로 귀환 희망자가 50여 만명에 달했고. 북한으로 귀환한 희망자는 1만명이 채 안 되었다. 이들 중 8만2천여 명이 귀환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같은 비율로 귀국했다 해도 일본 잔류 한국인의 남북 연고 비율은 거의 50:1인 것이다.

일본은 한반도 침탈 당시 한반도의 북부지역에 대륙병참기자화 등의 목적으로 공장을 많이 지었고, 상대적으로 남쪽은 농업지역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일제의 강제징용은 남한지역에서 많이 이루어졌고, 식민지하의 빈곤에서 벗어나고자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 또한 남한 출신이 많았던 것이다.

조총련의 등장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렇게 형성된 재일동포 사회는 남북 분단구도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놓이게 된다. 또한 동포사회의 분열, 일본의 노골적인 한인 차별, 전후 일본의일부 언론과 지식인들의 좌편향과 갇은 사회적 배경에다 결정적으로는 재일동포들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방기와 무관심이라는 조건을 맞게된다. 당시 이승만 정권으로서는 50년대 이후 내내 정치적 위기에 처했던 데다가 해방 후부터6,25 직후까지 해외와 북한지역으로부터 폭발적으로 유입된 인구들로 인한 갖가지 문제들 때문에 경황이 없었다. 그러니 재일동포 문제에까지 관심을 보일 능력도 의지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북한 정권은 재일동포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57년 조총련을 통해 당시 북한의 경제사정으로 보아 막대한 금액이었을 3억2백94만엔의 교육원조비를 보내기에 이른다. 이를 필두로 교육, 취업, 사회보장 등에서 엄청난 차별을 받던 재일 한인들에게 실질적인 지원을 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원은 공짜가 아니어서 나중에 교육원조비를 능가하는 엄청난 기부금으로 북한 정권에 돌아갔고, 장차는 북송사업의 물적. 인적 기반이 되기도 했다. 어쨌든 조총련 조직에 들어가면 교육을 받고(그것도 민족성을 잃지 않도록 우리말과 글로 수업을 받고)직장도 얻고, 융자대출도 받을 수 있었으니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는가.

해방 직후 김천해를 비롯한 일단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시작된 공산당계 재일교포단체는, 자연히 세력을 얻어 55년 한덕수 의장체제의 조총련으로 정비되기에 이르게 된다. 이들은 북한 정권의 이같은 지원을 받으면서 한때 재일동포의 2/3이상을 아우르는 규모가 될 수 있었다.

은 바로 이같은 역사적 배경과 그 연장선에서 재일동포 사회 내에서의 조총련이 지닌 위상을 일단 인정하고, 오늘의 조총련이 안고 있는 변화와 위기, 성과와 한계를 짚어보고자 했던 것이다.

조총련이 사실상 북한노동당의 일본 지부나 다름없으며, 그 기본 활동 목적은 일본의 좌익세력과 연계하여 일본에 남한침략기지를 구축하는 것이고, 혁명의 전초기지 역할도 맡고 있다는 기존의 정설은 그대로 인정한다(『동서세계대백과사전』), 또한 귀국사업이란 명목 하에 9만여 명의 재일동포를 고향도 아닌 북한땅에 이주시켜 북송교포의 인권문제를 발생하게 한 그들의 오류 또한 직시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조총련이 재일동포사회에 어떤 방법으로 스며들었으며, 그것이 온갖 차별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다수의 재일동포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는 있는 그대로 들여다봐야 할 것 아닌가. 그런 연후에 조총련이 맞이한 변화의 양상을 음미하고, 여타의 해외 한인과는 아주 동기나 형성 과정에서부터 다른 재일동포의 미래 문제까지 더듬어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적어도 광복50주년 특집에 걸맞는 프로그램의 방향성이 아니었겠는가

나란히 걸려 있던 태극기와 인공기

이렇게 해서 프로그램의 도입부는 도쿄의 조총련 본부와 북송항이자 만경봉호 입항기지인 니아가타항에서부터 시작하게 된다. 취재에 앞서 제작진은 정공법으로 해보겠다는 취지로 조총련 중앙본부를 비롯해 도쿄 조선대학교, 조총련계인 동포결혼상담 중앙센터, 조선은행, 상공인연합회에 취재 협조 공문을 보냈다.

"이 프로그램은 일제시대 이후 일본에서 숱한 탄압과 차별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살아온 재일동포들의 삶과 애환을 재확인하고 미래지향적으로 오늘의 현실을 짚어보고자 합니다. 작금의 일본 내 동포사회는 3.4세 동포들이 늘어나는 가운데 우리 동포들은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는 이른바 민단, 조총련 구분 없이 전체 재일동포 사회가 직면한 문제로서 ...... 무엇보다 정확한 사실을 토대로 상호간의 이해를 증진해야 할 것입니다......"와 같은 '간절한' 사연을 보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짐작대로 벽에 부딪쳤다. 이렇게 되면 다음 순서는 늘 해오던 방식뿐이다. 바깥부터 일단 촬영한 뒤 무조건 들어가서 옥신각신 시비하는 장면을 연출할 수밖에.

니아가타항에서는 마침 만경봉호가 입항중이었는데, 부두에는 북한으로 실려갈 생필품과 쌀 등이 잔뜩 쌓여 있었다. 북송용 쌀을 취급하는 일본 쌀가게를 취재한 사실이 뒤늦게 안 그들 쌀 원조 등과 관련한 북한의 식량난 취재로 알았는지 "일본에 오래 살던 사람은 동남아시아 같은 곳에 나갈 때도 쌀을 가지고 가는 데 그러는데 뭘 그러느냐?"며 변명했다. 아마도 이때가 연이은 수해로 흉년이 계속 되 북한의 식량난이 바야흐로 급속히 악화되던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카메라를 뺏으려 하는 등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갔던 것은 기억에도 새롭다. "남조선의 매스컴은 언제나 북한에 대한 악선전을 많이 뿌리고 있다."며 취재진을 거세게 밀치던 젊은 조총련계 요원의 고함이 귓가에 쟁쟁하다.(이런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취재했는데 '조총련 미화'라는 말이 나오다니......)

도입부에서 이러한 조총련의 폐쇄성을 보여줘 러시아 및 동구의 사회주의 몰락과 북한 김일성 주석 사후에 첨예해진 그들의 위기의식을 암시한 다음. 오사카 지역 민족학교 부분으로 넘어갔다. 민족학교 취재는 사실 이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였다. 방송 이후 상당기간이 지나도록 어떻게 해서 이 취재가 가능했는지를 물어오는 사람이 많았다면 짐작이 갈 것이다.

민족학교건은 취재한 나로서도 가끔은 '내가 어떻게 해냈지?' 할 정도다. 그 진상은 이렇다. 본 출장을 앞둔 7월 3일에서 10일 사이 나는 일본 '헌팅'을 갔었다. 이때 우여곡절 끝에 오사카 조총련 민족학교의 한 교장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이 때 솔직하게 취재의도를 털어놓으면서 인간적인 설득을 시도했다. 그랬더니 그는 의외로 "이렇게 공식적으로 남조선에서 취재를 요청한 것은 처음입니다. 해방 50년을 맞아 호상간에 이해를 증진할 기회라고 생각하니 오사카 본부와 의논해서 가급적 긍정적으로 해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게 7월9일의 일. 그런데 긴가민가 했는데 7월10일 귀국하자마자 연락이 왔다. 지금 취재에 응한다는 결정이 났으며, 각급 학교가 곧 방학에 들어가니 수업하는 장면을 포함해서 취재를 하려면 지금 바로 오사카로 와야 한다는 전언이었다.

이들이 과연 무슨 의도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알 수 없다. 누구 말마따나 고도의 선전선동술의 일환으로 '굴러들어온 떡'을 활용한 것인지, 정녕 사심 없는 결정이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설령 그들의 속셈이 전자의 것이라 해도 나로서는 순수한 결정이었음을 지금도 믿고 싶다. 실제로 2박3일의 취재기간동안 민족학교 내에서의 취재는 자유로 왔다. "민족학교에 사상교육이 너무 많지 않느냐?""학생수가 줄어든 다는데 대책이 있는가?"또는 "학교 건물이나 학급에 정치성 구호가 많이 붙어 있는데, 이럴 필요가 있는가?"와 같은 질문도 제한 없이 할 수 있었다.(물론 대답은 판에 박힌 답변이 많았지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초급학교 5학년 사회시간에서 있었다. 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의 남북단일팀을 교과내용으로 가르치는데, 칠판에는 태극기와 인공기가 나란히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김일성. 김정일 초상화 아래서, 그들이 그 수업을 보여준 의도가 어디에 있었든지 간에 그 장면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치마저고리 입힌다고 민족교육인 건 아니다.

팀은 조총련의 민족교육이 일본땅에서 자라나는 3.4세에 치마저고리를 입히고 우리말을 철저하게 가르치는 등 민족의식 함양에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부분을 평가했다. 그러나 그들이 자랑하는 우리말 교육도, 학생들이 돌아가면 가족과도 일본말을 쓰는 등 현실적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 또한 적시했다.

뿐만 아니라 최근 몇 차례의 교과과정 개편을 통해 김일성 우상화나 북한의 체제나 이념에 관한 내용이 빠지고 일본 사회에 대한 내용이 많이 들어가긴 했으나 본질적으로는 별로 바뀌지 않았다는 점, 특히 그들이 말하는 조국은 '공화국' 즉 북한을 의미하는 것이 어서 반쪽 짜리 민족교육임도 지적했다. 학생들에게 한국에 대해 궁금한 것을 물어보라고 했더니 삼풍백화점 붕괴니, 임수경양에 관한 질문 따위만 나오는 것이 바로 그랬다.

무엇보다 조총련계의 테두리 안에서 교육을 받고 자란 학생들은 장차 조총련이라는 조직 안에서 보호를 받고 실제로 민족학교니 하는 곳에 무난히 취직할 수 있지만, 그 울타리만 벗어나면 일본사회 내 적응력이 떨어진다는 점을 민족학교 졸업생의 증언으로 밝혀냈던 것이다.

결국 조총련이 일본 내에서 재일동포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지만, 민족학교 교육을 통해 민족성을 담보로 테제이데올로기 주입-반복학습을 통해 조직요원 양성-졸업 후 조총련 본부와 산하조직 및 조선은행 등 조총련계 산업현장에 인력 공급-자영업자. 중소상공업자들에게 사업 편의를 제공하며 연대유지-결과적으로 조직에 대한 의존성을 높이는 배타적 생활공동체의 조성-경제난에 처한 북한의 대외지원세력 역할 수행등과 같은 일련의 메커니즘 속에 있음을 정리했다. 이 과정에서 조총련이 어떻든 동포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했으며 진학. 직장 .사업 등의 방면에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음을 평가하고, 상대적으로 민단계의 활동은 전무하거나 극히 부진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민족학교 학생들의 대부분은 부모가 조총련 산하에 있었다. 그리고 상공회의소, 신용금고에서 일하는 직원들 역시 거의 민족학교 출신이었다. 재일동포 중20만이 안 되는 수가 조총련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조직을 떠나서는 살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들은 이제 와서 굳이 조총련을 이탈할 수 없다는 그들의 입장을 내비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하여 취재기간 중 도쿄에서 만난 민단의 한 조총련 전문가는, 조총련의 세력이 매우 약화된 것은 틀림없지만 지금껏 남아 있는 사람들은 북한 정권의 동향과 상관없이 상당기간 조총련을 지키게 되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재일 동포는 이주 동기와 형성 과정이 다른 해외 한인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조총련은 그런 특별한 역사적 배경에서 형성되었다. 지난 시절 그들이 범한 오류까지 용인 할 수는 없겠지만, 재일동포 사회 내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인정해 줄 필요가 있다. 특히 일본 내에서 차별 받는 민족으로 살아가면서 그리고 무엇보다 생존의 문제가 절실했던 다수의 재일동포에게 조총련이 기어했던 점은 이제는 지나간 역사의 한 부분인 만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특히 민단계 동포 자제의 대부분이 일본학교를 다니고 일본인과 '국제결혼'을 하면서 민족의식을 잃어가는 이 시점에서는 말이다.

아이러니인가 넌센스인가

'조총련에 대한 미화, 찬양'이라고 규탄했던 시청자는 프로그램의 어느 부분을 그렇게 보았을까? 민족학교의 철저한 우리만 교육과 조총련계 상공회의소의 동포들에 대한 지원활동을 소개하는 것이 그렇게 못마땅했을까? '조총련에 대한 상투적인 매도'라고 비난한 시청자는 또한 왜그랬을까? 만경봉호 앞에서의 험악한 광경, 그리고 "민족학교에는 조총련의 세계밖에 없고 자기가 선택하는 길도 없다" 고 한 민족학교 졸업생의 폭로 장면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프로그램의 형평성을 갖추려고 나름대로 노력한 부분들을 그렇게 본 것만 같아 당혹스러웠었다. 그러나 차분히 프로그램을 보면 미흡한 점 또한 없잖다. 민족학교 부분은 좀더 압축해서 정리했더라면, 그리고 조총련이 맞는 변화상을 좀더 다양하고 심층적으로 파고들었더라면...... 또 도쿄 중앙본부의 취재를 어떻게든 성사시켜 핵심을 찔러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든다. 한편에선 조총련 문제를 남북 대립적인 시각이 아닌 재일동포의 문제로 봐야 한다는 결론은 전체적인 흐름에 비추어 지나치게 강했다는 지적도 있었다.

어쨌든 8.15 특집「조총련의 오늘」은 95년 8월 8일 밤 11시에 그렇게 방송됐다. '방송사상 최초의 조총련 민족학교 본격 취재'의 광채가 공중에 날아간 전파와 더불어 스러진 뒤 나는 몇 가지 후유증을 치러야 했다. 조총련 취재는 통일원. 공보처. 안기부 등 이른바 관계당국의 승인. 보고. 협조가 필요한 사안이었는데, 이들 관계자와의 유려하지 못한 업무처리로 말미암은 불협화음도 있었다. 그 중의 어떤 부분은 지금도 공개할 수 없다.

조총련 취재와 관련해서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아마도 '북한주민접촉 사전승인'일 게다. 중국 연변지역에서 엄연히 북한주민으로 간주될 법한 탈북자를 취재할 때는 필요하지 않은 '북한주민접촉 사전승인'이 일본의 조총련계 동포를 취재할 때는 그들의 국적이 단지 '조선'이라는 이유하나만으로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이러니인가. 넌센스인가. 하기야 명함에 '남조선'이란 표기를 했다고 용공시비에 휘말리고 국회의원 자격이 왔다갔다하는 판국이니, 95년의 8.15특집「조총련의 오늘」은 정녕 너무 빨리 날아왔던 제비 한 마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거꾸로 선 세상에도 카메라는 돌아간다, 도서출판 개마고원,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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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2.03.20 -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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