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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정길화
Subject   MBC「PD수첩」 8.15 특집 '수수페 호의 침묵' 제작기
천문학적 제작비용의 벽 '꿩 대신 닭' 작전으로 극복

수수페 호수에 신라 금관이나 백제 금동향로가 있다면 모를까. 일제에 희생된 집병·징용 한국인의 유골이 들어가 있을 뿐인데 과연 누가 그만한 비용을 감당하겠는가. 수수페를 어떻게 수습해? 좋게 말해 프로그램 기획이 현실 여건에 비해서 너무 앞서 갔고 달리 말하면 너무도 비현실적인 기획을 한 셈이다.

지중해 바다 깊이 침묵하고 있던 크레타문명을 보란 듯이 온 세상 사람들에게 건져 올려 보여주게 한 계기는 전해 내려오던 전설이 시발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입에 장구히 전해지는 얘기에는 반드시 근거가 있다는 증좌로 보기에 손색이 없는 일화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지 않으며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고 많은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중구삭금'(많은 사람의 입은 쇠도 녹인다)이란 말도 그래서 나온 것이렷다.

8·15특집 '수수페호의 침묵'(8월12일 밤 11시 방영)의 시작도 그러했다. 그 미약한(?) 시작은 지난해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필자는 빠듯한 일정 속에 어떻게 간신히 시(時) 테크에 성공해 가족들과 함께 3박4일의 사이판 여행을 다녀왔다. 아무 생각 없이 휴가를 위해 떠났던 그 여행에서 처음으로 수수페 호수에 얽힌 미스터리를 접하게 됐다. 태평양 전쟁 최대의 격전지였던 사이판 섬에서는 민물 호수가 하나 있다. 그 이름은 수수페(Susupe). 휴양 관광지로 각광받는 사이판에 있는 호수인 지라 필경 경관이 빼어날 것이고 호수 주변에는 최고급 호텔과 리조트가 가득하고 풀장 이곳저곳엔 팔등신 미녀가 선탠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으리라 짐작되겠지만 이 호수 주변은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다. 민가도 드물고 사람들 발길도 닿지 않으며 물놀이는커녕 낚시하는 사람도 없다. 그 이유는 바로 2차대전 당시 사이판 섬의 일본의 장악 아래 있을 때 많은 징용 한국인과 원주민들이 그들의 가혹 행위로 죽어갔고 미군의 공격 때에도 역시 징병·징용 한국인들이 죽어갔는데 이들 중의 다수가 이 호수에 수장(水葬)되었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소문으로 떠도는 일제의 만행 현장 탐사 의욕

직업은 속일 수가 없다더니 귀가 번쩍 뜨이는 얘기였다. 관광 가이드로부터 그 말을 접하게 된 나를 다큐멘터리스트로서의 호기심과 궁금증이 발동해 도저히 이를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출처가 관광가이드였다는 사실. 해외 여행을 다니신 분은 알겠지만 가이드의 얘기 중에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재미로 하는 얘기가 상당히 있다. 그래서 나름대로 사이판 현지 교민, 주재원들을 통해 확인 취재를 해보았더니 그들도 대부분 그런 얘기를 원주민들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만난 원주민들도 같은 얘기. 이 정도면 하나의 설(說)또는 의혹만 가지고도 프로그램은 충분히 가능하겠다는 판단이 섰다. 놀러와서 까지 일거리를 챙긴다고 가족들의 곱지 않은 눈초리가 뒤통수에 꽂히고 있었지만 내 얼굴에는 내심 한 건 올렸다는 회심의 미소마저 흘렀다.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지난해 필자는 에서 유골 유해와 관련된 두 아이템을 취재 방송했다. 그 하나는 5월 29일에 방송된 '쓰시마의 표류하는 영혼들'이고 또 하나는 6월 25일에 방송된 '98인의 유해'이다.

'쓰시마의 표류하는 영혼들'은 일본 쓰시마에서 발견되는 한국 해상 조난자의 시체 처리에 관한 내용이고, '98인의 유해'는 국방부의 북한군 묘지 조성에 즈음에 한국 땅 여기저기에 있을지 모르는 북한군 유해를 수습해 장차 있을 남북한 유해인도협정에 대비하자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소재를 취재하면서 필자의 뇌리에는 사이판섬 수수페 호수의 미스터리가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쓰시마의 표류하는 영혼들'이 방송위원회 선정 '이 달의 좋은 프로그램'을 수상하였고 이후 수상자들을 대상으로 프로그램 기획안 공모를 하였다. 수수페의 미스터리는 즉각 필자의 상상 공간에서 벗어나 프로그램 기획안으로 구체화돼 출품되기에 이르렀다. 불확실한 소문의 진상을 파헤치고 일제 만행의 또 다른 현장을 만천하에 공개한다? 뜻대로 된다면 정말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방송위원회에서는 이 기획안에 덜컥 찬표를 던지고 2천만 원의 제작비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운명이 정해지면 PD는 혼신의 힘으로 전력투구를 한다. 방송일은 8월 12일로 즉 8·15특집이다. 두 차례의 유골 관련 아이템 방송으로 필자에겐 한동안 '유골 전문 PD' 라느니 '뼈다귀PD'라느니 하는 과분할(?) 정도의 별명이 따라 다녔다. 과연 뼈다귀전문PD로서 진면목을 보여줄 것인가. 역사를 다시 쓰는 각오로 뛰어들었던 나의 기세는 그러나 헌팅을 하면서 현격한 변화를 맞이하였다.

수수페 호수의 둘레는 1.8km, 수심은 2m 부영양화가 심해 호수의 시계(視界)는 전혀 확보되지 않는다. 게다가 치명적인 것은 호수 밑바닥이 뻘이라는 사실. 도대체 깊이조차 알 수 없는 뻘이 호수바닥에 가득했다. 수중촬영을 해도 그림이 안나오고 발굴작업을 하려해도 이 거대한 뻘 바닥엔 대책이 없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삼성건설기술연구소, 해양연구소 등 관계 전문가에 의뢰해 긴급 자문을 받아보았다. 만약 대량학살이 있어서 호수에 시체가 많이 수장 됐다면 53년이 지난 지금(사이판 함락은 1944년 7월 7일의 일이다)모두 부패해 유골로 남아 있을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바닥이 뻘이라면 이 경우 유골의 중력으로 뻘 끝까지 침하 돼 있을 것이다. 유골이 호수바닥 즉 호상(湖床)과 뻘 사이에 있다면 이는 수중촬영과 같은 육안 관측으로는 알 수 없고 지표레이더(G.P.R)와 같은 초음파 장치를 이용해서 측정할 수 있으나 유골이 흩어져 있을 경우엔 G.P.R로도 확실히 알 수 없다. 유골을 인양 발굴하려면 호수의 물을 빼고 뻘을 흡입해 낸 다음 고고학 발굴식의 정밀 발굴을 해야한다. 마치 신안해저유물선 발굴과 같은 방식이 될 것이다. 여기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은 추정하기도 어렵다. 아마도 천문학적인 비용이 될 것이다.

대략 이와 같은 비관적 자문에 접한 필자는 암담해 질 수밖에 없었다. 수수페 호수에 신라 금관이나 백제 금동향로가 있다면 모를까. 일제에 희생된 징병·징용 한국인의 유골이 들어가 있을 뿐인데 과연 누가 그 만한 비용을 감당하겠는가. 프로그램은 암초에 부딪쳐 흔들리고 PD는 수수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수수페를 어떻게 수습해? 좋게 말해 프로그램 기획이 현실 여건에 비해서 너무 앞서갔고 달리 말하면 너무도 비현실적인 기획을 한 셈이다.

장기간에 걸친 일본의 유골 수집활동 포착

결국 '수수페호의 침묵'은 방송 위원회와 협의를 거쳐 인양발굴은 제외한 상태에서 최대한 주제를 살리는 방식으로 가닥을 잡았다. 주제 의식의 심화라니 표현이 그럴듯했을 뿐 사실상 '팥 없는 찐빵'이다. 그러나 역시 운명이 결정되면 PD는 간다. 사이판 전역에 흩어진 일제의 만행을 쫓아 작열하는 열도(熱島)를 샅샅이 뒤진다. 이때 필자가 발견한 새로운 사실이 바로 일본의 장기간에 걸친 조직적이고도 집요한 유골 수집활동이었다. 프로그램의 의의를 찾을 만한 새로운 방향이었다. 태평양전쟁에 패한 일본은 전후 냉전 체제에 기적적으로 편승해 경제부흥을 이룩하자 1950년대 말부터 북으로는 시베리아, 남으로는 마셜군도, 솔로몬제도에 이르는 태평양전쟁 격전지 전역에서 소위 전몰자의 유골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매장되고 방치된 유골을 수습해 일본식으로 화장하고 도쿄의 지도리가후지에 있는 전몰자묘원에 성대히 안치했던 것이다. 그 같은 일은 후생성 등 정부의 주도로 40여년간 꾸준히 행해져왔다. 옥쇄가 있었던 사이판 등지에도 예외가 아니였다. 6만 여명이 전몰한 사이판에서 지금까지 2만여구의 유골이 수집됐다고 한다.

프로그램은 일본의 유골수집 활동의 규모와 추이를 분석하고 그들의 의도를 점검해 보았다. 인도적 차원이라는 그들의 설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한국인의 피해의식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쩐지 유난스런 그들의 유골에 대한 집착은 과거 역사를 미화하고 전쟁 책임을 희석시키려는 의도가 아주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이 유골수집에 급급한 나머지 사이판 선사시대 주민들의 유골이나 동물 뼈까지를 훑어가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 있음을 밝힌 것은 그런 대로의 수확이라고 자평하고 싶다.

필자는 이번으로 에서 세 번째 8·15특집을 맡았다. 95년 '조총련의 오늘'과 96년 '머나먼 귀향―사할린의 한인들'에 이은 '수수페호의 침묵'. 이제는 미래지향적인 8·15특집을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하며 필자는 프로그램'수습 후의 침묵(?)'으로 빠져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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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2.03.20 -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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