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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정글화 (http://jungpd.co.kr http://jungpd.co.kr)
Subject   한국인 멕시코 이민 100주년 특집 3부작 “에네껜(henequen)”

MBC 가이드 2월호>>>

한국인 멕시코 이민 100주년 특집 3부작 “에네껜(henequen)”

제 1부 꼬레아노의 노래/제2부 백년의 유랑/제 3부 꼬르멕스(Cor-Mex)의 새로운 세기
기획 최진용, 연출 정길화, 글/구성 김미라, 촬영 최정길, 음악 박진석

2005년은 멕시코 이민 100주년의 해

  2005년 올해는 주지하다시피 광복 60주년의 해다. 또한 을사 늑약 100주년의 해이면서 한일수교 40주년을 맞는 해다. 그러면서 2005년은 6.15 정상회담 5주년의 해이기도 하다. 필경 방송가에서는 올해 내내 한일 관계와 한반도 상황을 점검하는 다큐멘터리와 특집 프로그램이 줄을 이을 것이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올해는 멕시코 이민 100주년의 해라는 것이다.
  바로 100년전인 1905년에 최초로 한국인의 멕시코 이민이 있었다. 유카탄 반도 메리다의 에네껜(henequen 우리말로 어저귀, 영어로는 사이잘 sisal. 선인장의 일종으로 섬유질을 추출하면 선박용 로프의 원료가 되었다. 종전 ‘애니깽’으로 알려진 것은 잘못된 표기) 농장에 천 여명의 한국인 노동자가 이주한 것은 1905년 5월 중순이다. 그로부터 100년, 에네껜 이민들은 모국에서 잊혀진 채 이역만리 멕시코에서 가혹한 삶을 살아야 했다. 에네껜 이민들의 이야기는 그동안 연극이나 영화, 방송프로그램 등으로 알려진 바 있다. 그럼에도 이번에 10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를 우정 만드는 것은 100주년이라는 말이 주는 숙연한 어감 - 참으로 질기고 장구하다, 어언 100년이라니... -도 어감이지만 오늘의 시점에서 멕시코 이민사를 자리매김하고 다시 새로운 100년을 시작하려는 것에 그 참뜻이 있겠다.  
  2004년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기획자로서 직접 제작한 ‘만주의 친일파’, ‘중국의 6.25 참전’을 포함한 13편으로 6년차 시리즈를 끝낸 내게 주어진 새로운 과제는 멕시코 이민 100년사였다. 그동안 8.15 특집 프로그램 등을 통하여 사할린 동포의 귀환 문제, 사이판 징용 한인들의 수난, 조총련 재일동포의 정체성 등 해방전 한민족 유민사에 간헐적으로 접근해 왔던 내게 멕시코 이민사는 강렬한 과제로 다가왔다. 사전 준비가 끝나면서 2004년 9월중 현지 헌팅을 실시하였고 지난해 11월 14일부터 12월 19일까지 촬영팀과 함께 36일간 멕시코, 쿠바, 미국 엘에이 등지 현지 출장을 다녀왔다. 이로써 지난 100년간 ‘에네껜 한인’들이 겪어야 했던 처절한 영욕의 궤적을 더듬을 준비가 된 것이다.
 
  세계 이민사에 유례 없는 ‘디아스포라’
 
   한국인 멕시코 이민의 가장 큰 특징은 세계 이민사에 유례가 없는 단 1회의 집단 이민이다. 1905년 4월 1,033명의 한인들이 영국 국적 상선 ‘일포드’호를 타고 제물포항을 떠났다. 그리고 그들은 반세기 이상 우리에게 잊혀졌다. 한일합방과 2차 대전, 한국전쟁 등 현대사의 격류 속에서 이들은 모국과 단절되었다. 이민의 출발은 기만적인 ‘사기광고’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대한제국이 발행한 여권 등 최소한의 합법적 형식은 갖추었는지 모르나 이미 고종의 이민금지령이 공포된 상황에서 배는 출발하였다. 4년간의 채무노동은 ‘사실상 노예’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닐 정도로 수난과 고통의 점철이었다. 멕시코 에네껜 이민은 이미 2년 전에 시작되었던 하와이 사탕수수 이민과도 현저히 다르다. 왜 그들의 이주는 단 1회로 끝났는가. 동포들이 마이어스라는 국제 이민 브로커의 농간으로 이역만리에서 고통받고 있을 때 당시 그들의 조국은 어떻게 대처하였는가. 일제의 지배를 직전에 둔 대한제국의 무력함, 그리고 그 와중에 하와이에 있는 일본인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 멕시코 한인 이민 문제를 교묘하게 이용한 일본 정부... 에네껜을 들여다 보면 20세기초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적인 역학관계가 보인다. 이 부분에 대한 문제의식은 본 프로그램의 2부에서 심화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조상이 묻힌 선영과 일가친척을 두고 머나먼 멕시코 땅에 남겨진 한인들의 질기고 억센 삶 자체다. 그들은 지난 세월 동안 열악함과 척박함을 어떻게 극복하였는가. 그리고 10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모진 것이 목숨이라 한인들은 어떻게든 멕시코에서 살아남았다.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낯선 땅에 떨어진 이들이 걸어온 길은 고스란히 눈물겨운 역정이다. 초기 이민자들의 자원이 풍부한 미주 한인 사회만큼은 못하지만 후손 중에서 하원의원, 주 대법원장, 자선 아동병원장도 나오고 교수, 회계사, 의사, 엔지니어는 부지기수다. 화가, 연주가, 마야유적을 지키는 문화재 관리소장, 오페라 프리마 돈나, 프로레슬러도 있다. 한민족의 특징 중의 하나인 드높은 교육열은 이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면서 한민족의 강인한 생존력을 확인할 수도 있다.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만약 지구촌에서 각 민족을 대상으로 서바이벌 게임을 하더라도 한민족의 적응과 경쟁력을 자신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바야흐로 인고와 수난의 한 세기를 마감하고 도전과 개척, 융합과 포용으로 멕시코 이민사를 재구성할 때다. 1부의 주 내용은 이러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한인들의 멕시코로의 디아스포라(離散) 이후 100년이 지났다. 지금 1세대의 한인은 모두 죽고 2세도 거의 없다. 최고령으로는 메리다의 고흥룡 할아버지가 100세인데 그는 1905년 8월 현지에서 태어났으니 1.5세라고 할까 2세라고 할까. 후손들은 이미 5세, 6세에 이르고 에네껜 후손은 멕시코 전역에 3 - 4만 정도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21년에 멕시코 한인 중의 일부인 270 여 명이 쿠바의 사탕수수 농장 경기가 좋다는 말을 듣고 재이주를 결행하였다. 이들은 국제적인 사탕수수 시세의 폭락으로 상투를 잡은 꼴이 되었다. 사탕수수 밭과 공장은 그들에게 일자리를 주지 못하였다. 한인들은 쿠바에 산재해 있던 그 한맺힌 에네껜 밭으로 다시 가야만 했다. 그래도 쿠바 한인 중에서 정부 고위직을 지낸 이도 있으며 전문직종 종사자의 비율은 매우 높다. 오늘날 쿠바에 살고 있는 한인 후손은 천 명이 넘지 않는 것으로 추산된다.
   멕시코와 쿠바 한인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각별한 존재로 다가오는 것은 그들의 웅숭깊은 조국애 때문이다. 어려운 시절 일제 치하에 있는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에네껜 밭에서, 사탕수수 밭에서 혹은 냄비 땜질을 하며, 치클 껌을 긁어모으며 번 돈을 모아 임시정부에 송금을 하였다. 그래서 이들 중에는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운동을 인정받아 훈, 포장을 받은 이도 있다. 이들을 결속시킨 것은 항일운동이라는 정신적 구심점이었는데 정작 외세에 의한 해방과 동족상잔의 전쟁, 분단 이후엔 조국에 대한 실망감으로 그들의 귀속의식은 상당히 이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유달리 단일민족으로서의 집단주의 문화가 강하고 혈연의식이 드센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에네껜 이민의 후손은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현지에서는 치노(chino 중국인의 뜻. 멕시코, 쿠바에서는 동양인만 보면 이렇게 말한다)라고 놀림을 받고 한국인으로부터는 외국인으로 취급받는 이들에게도 정체성 문제는 여전히 숙제다. 멕시코에서든, 쿠바에서든 장기간의 단절과 격리 속에 불가피하게 그들은 대부분 동화될 수밖에 없었다. 혼혈로 인해 얼굴도 현지화가 완연하고 한국말도 할 줄을 모른다. 그러면서 적어도 자신의 뿌리가 한국이라는 것은 분명히 의식하고 있다.
  100년의 역사는 장구하다. 100년의 역사를 기리는 것은 지나간 한 세기의 세월에 대해 경의를 표하자는 취지일 것이다. 그러나 역시 한 세기의 졸업은 새로운 세기의 시작이다. 이제 바야흐로 새로운 100년의 역사가 출발하는 것이다. 한국과 한국인은 멕시코와 쿠바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 문명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가. 과거 한인들의 희생을 기초로 해서 한국과 멕시코, 한국과 쿠바는 어떤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이번 프로그램을 마무리하는 주제의식이 되고 있다. 따라서 프로그램의 전체 구성은 100년을 맞은 현재에서 출발해 지나간 과거를 더듬고 향후의 미래를 모색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현지에서 올린 성과들

카날 온세와 의향서 체결, 오는 5월에 멕시코 현지에서도 방송
폭스 대통령 영부인 한인 이민 100주년 축하 메시지 단독 인터뷰
97년 전 에네껜 농장 한인들 급여명세서 국내 최초 발굴, 공개
1921년 마나티항 입항 기록부 발굴, 쿠바 이주 상황 진실 밝혀
  
   제작진은 현지취재 도중 이미 보도된 대로 일정한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먼저 멕시코 공영방송사인 카날 온세(‘채널 11’이라는 뜻)와 공동제작 및 상호 협조에 관한 의향서를 체결하였다. 그 내용은 카날 온세측으로부터 에네껜 프로그램 관련 자료화면을 공급받고 MBC는 카날 온세측에 이 프로그램의 지상파 방영권을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오는 5월이면 멕시코 전역에서 한국인 멕시코 이민 100주년 특집 프로그램이 방송될 것이 기대된다. 사실 이민 100주년은 우리만 기릴 것이 아니라 멕시코인들과 이를 공유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20세기초 에네껜 농장의 영상과 멕시코 독립전쟁, 멕시코 혁명 등의 생생한 자료화면을 무상으로 사용하면서도 MBC 프로그램을 멕시코와 중남미에 전파하는 계기를 만든 것은 적지 않은 성과라고 생각한다. 이번 일은 기획국, LA 미주지사, 국제교류팀, 콘텐츠사업부, 법무저작권부 등 사내 유관부서가 입체적으로 지원한 결과로서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뜻을 전한다. 이제 남은 문제는 내가 만드는 프로그램의 깜냥에 달려 있는 셈이다.
   그리고 비센테 폭스 멕시코 대통령 영부인과의 단독 인터뷰를 성사시켜 멕시코 이민 100주년 축하 메시지를 취재한 것도 성과라고 할 만하다. 폭스 여사는 대통령 관저에서 이루어진 이 인터뷰에서 "1905년에 멕시코 살리나 크루스를 거쳐서 유카탄에 도착한 1,000여명의 한인들이 멕시코와 한국간의 역사를 개막한 주인공들인데 지난 100년 동안 그들이 걸어온 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대해 "100년전에 이곳으로 오게 된 한국 사람들과 지난 한 세기 동안 그들이 멕시코에서 이룬 모든 것들을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고 경의를 표했다. 폭스 여사는 또 "두 팔을 활짝 벌려서 한국인들의 방문을 환영한다" 고 강조하였다. 이어서 폭스 여사는 "멕시코에 정착한 한인들이 두 문화간의 교류와 소통을 위해 기여한 바를 높이 평가한다"고 말하고 "멕시코와 한국은 서로의 문화가 완전히 다르지만 서로가 서로를 통해 배울 수 있게 되어 한국인들의 이주와 그 이후 지금까지의 체류를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또한 제작진은 당시 에네껜 농장에서 일하던 한인 노동자들의 임금 실태와 노동 상황을 알 수 있는 '주급 명세서'를 현지에서 발굴하였다. 이는 1908년 7월 27일에서 8월 1일까지의 친낄라 농장에서 마야 원주민 노동자와 한인 노동자들에게 실제로 지급한 임금 내역 등을 기록한 것으로, 4년간의 계약기간(1905. 5. 13- 1909. 5. 12)) 당시 어떤 조건에서 한인 노동자들이 일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다. 국내에는 최초로 공개되는 이 신문용지 전지 크기의 주급명세서는 97년이 지난 연륜을 말해주듯 누런 색으로 바래져 있는데 박물관 측은 취재진 카메라의 플래쉬도 못쓰게 할 정도로 엄격히 보관하고 있었다. 앞면에는 마야 노동자들의 명단과 요일별 일당 명세가 기록되어 있고 뒷면에는 33명의 한인 노동자의 그것이 상세히 적혀 있어 당시 생활상과 농장 운영 실태를 파악할 수 있다.
   이 명세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우선 적어도 동일 노동에서는 한인들과 멕시코인 사이에 차별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인들의 임금은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정도로 밝혀졌다. 멕시코 이민사를 연구하는 이종득 교수(덕셩여대 스페인어과)는 제작진이 입수한 '주급 명세서'를 검토한 뒤 "그동안 기록의 부족으로 적확하게 연구되지 않았던 초기 계약기간 당시 한인 노동자들의 상황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사료"라고 평가하고 "이번 MBC의 특집 프로그램을 통해서 보다 진전된 종합적인 연구가 기대된다"고 말했다.
   또 하나의 성과는 쿠바 이민 상황에 관한 기록이다. 취재진은 쿠바 마나티에서 당시 한인들이 타고온 따마울리빠스(Tamaulipas)호의 입항 사실이 적힌 마나티항 입출항 기록부를 국내 최초로 취재하였다. 이에 따르면 한인들이 타고온 따마울리빠스호는 증기선이었고 3월 11일 1차 입항했다가 13일에 출항하였으며, 24일에 재차 입항하여 26일에 출항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동안 2차 입항 즉 한인들의 상륙과 관련해 지금까지 알려지기로는 25일설, 26일설, 28일설 등이 있었으나 이번 발견으로 입항 일자는 3월 24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한인들은 쿠바에 입국할 당시, 대부분 출생지는 한국으로 그리고 국적은 일본으로 기록된 멕시코 비자를 가지고 상륙한 사실도 확인되었다.

별도 박스 기사>>>>
8인의 성공시대...

멕시코, 쿠바에서 활약하는 3, 4세 한인후손들의 성공담 다룬다
하원의원, 주 대법원장, 병원장, 법의학 교수, 화가, 연주가 등  

1. 노라 유 (Nora Yu Herandez)

정치 야심만만한 멕시코 한인후손 중 첫 하원의원

  멕시코 하원의원(PRI 제도혁명당 소속), 지역구는 치와와 주, 후아레스 시.
  노라 유는 에네껜 이민 1세 유진태의 증손녀다. 기계(杞溪) 유씨 가문으로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兪吉濬)이 유진태의 종질(宗姪)이 된다. 유진태 일가는 처음에 메리다 레판 농장에서 일하다 노라 유의 아버지 엔리케 유가 14세 때 베라크루스로 이동하였고 다시 그가 17-18세 때 멕시코주로 이동하였다. 노라 유의 아버지는 매일 새벽 5시부터 밤 11시까지 일을 하면서 부를 축적해 오늘에 이르렀다.
  노라는 엔리케의 7남매 중 장녀(1남 6녀). 노라는 학창 시절부터 리더쉽을 발휘하였는데 모임을 만들어 리더가 되곤 하였다. 그러나 두 차례 후아레스 시장에 출마하여 모두 낙선하였다. 2003년에 마침내 후아레스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지역에서는 12년만에 처음으로 PRI당 소속으로 당선되었다고 한다. 멕시코 국회에서는 경제 분야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다.
  일을 너무 열심히 하고 많이 하는 여자, 노라 유. 그래서일까 그녀는 미혼이다. “내 인생 자체가 일로 가득차 있다. 나를 일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남자가 나타나면 결혼할 용의가 없지 않다”고 웃으며 말한다. 그리고 “일하느라 집에 있는 날이 거의 없는 나를 어느 남자도 아마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앞으로 후아레스 시장이 되고 싶다. 먼저 시장이 되고 그리고 나면 또 다른 목표를 세울 것이다”고 거침없이 향후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말한다.

2. 리스벳 로이 송(Lizbeth Loy Song Encalada)

동양계 이민, 여자라는 약점 극복한 철(鐵)의 대법원장

   한인 4세 후손으로 멕시코 동남부에 위치한 낀따나 로(Quintana Roo)주의 주 대법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51세. 리스벳은 1982년 주 법원 가정판사로 임용되었으며 민사부 판사, 정원외 대법관을 거쳐 1992년 정규 대법관이 되었다. 2000년 3월에 주 대법원장이 되었다.
  주 대법원장이 된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비결은 없다. 강직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모든 일을 책임감 있게 처리하는 것밖에 없다. 열심히 일해서 인정받으면 어렵지만 불가능한 일은 없다고 믿는다.”고 단호히 대답하였다. 한인 후손으로 또 여자로서 불리한 것은 없었느냐는 질문에는 “동양계 이민의 후손이라는 것은 약점이 되지 않았고, 일반적으로 여자이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은 있었다. 그러나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면 높은 자리로 승진하면서 남들보다 뛰어날 수 있었다”고 강조하였다. 똑같은 입장의 한인 후손 여성이 같은 길을 걷고자 한다면 어떤 충고를 해줄 수 있느냐는 질문에도 “처음부터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부지런히 노력하라. 목적에 걸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 인생에는 쉬운 일이 없다”는 쉽고도 어려운 답을 준다.

3. 뻬드로 가브리엘 총 킹

"세 번의 선택이 나를 만들었다"는 티후아나의 아동자선병원장

  띠후아나 캘리포니아 아동협회 병원 원장. 성의 '총 킹'은 '정 김'의 변형이다.
  그는 캘리포니아 지역 어린이를 위한 의료 봉사 기관의 설립자이며 책임자다. 미국, 캐나다, 멕시코에 있는 사립 자선 병원재단인 이 재단의 공식 이름은 “빠라 로스 니뇨스(PARA LOS NINOS)” 즉 ‘어린이들을 위하여’다. 이 병원은 영업목적을 가지지 않는 의료기관으로 의사들도 대부분 무상으로 자원 봉사를 하며 재정은 모금운동과 기업, 동호회, 프로 스포츠팀 등의 기부금으로 운영된다. 한국의 삼성과 현대에서도 기부를 하고 있다.
   그의 오늘이 있기까지 모두 세 번의 선택과 결정이 있었다. 한국에서 멕시코로 온 할아버지, 유카탄에서 띠후아나로 온 아버지 그리고 의과 공부를 하기로 한 그 자신이다. 이러한 결정에 대해 그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할아버지의 선택이 좋았다 나빴다 판단하기는 힘들다. 그들은 당시 어려운 상황에서 모험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아버지가 유카탄에서 이곳 띠후아나로 온 것은 참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그 덕분에 우리는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개인적으로 의과대를 진학한 것은 최고의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대학을 거의 무료로 다닐 수 있었다. 경제적인 면을 떠나 남을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좋은 일이다.”고 말하고 있다.  

4. 라몬 리 레혼(Ramon G. Lee Rejon)

유카탄 반도 치첸 잇사의 마야문명 지킴이

  유카탄 마야 유적지 치첸잇사(Chichen Itza)의 관리소장 (Coordinador Unidad 고고학 유적지 문화 및 관광 업무 조정관).
   라몬이 하는 일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야 유적지 치첸잇사의 관리 책임이다. 치첸잇사는 하루에 5천 - 6천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데 대부분 유럽인들이다. 관리소 직원은 현재 모두 39명이다. 이들은 유적지 안내를 필두로 매표, 경리, 수공예업자, INAH(멕시코 국립 고고역사연구소) 소속 연구원 등이고 라몬은 이들을 지휘, 감독한다.
   한인 후손으로서 이곳 치첸잇사에 요즘 들어 한국인들이 많이 찾아오는 것에 그는 뿌듯함을 느끼고 있다. “한국은 옛날에 많은 고통을 받았지만 그것을 잘 극복하고 크게 성장을 한 나라다. 특히 이민 100주년을 맞아 한국 정부에서 유카탄에 100만불 짜리 병원을 기증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자랑스럽다.”라고 말한다. 그의 희망은 언젠가 한국에 가서 한국문화와 역사를 접해보고 싶은 것이다. 또 있다. “5년 뒤 나는 이곳에서 퇴직하게 된다. 공무원으로 한 30년 일하는 셈이다. 그 때 여기서 여행사를 차려 이곳에 오는 한국 사람들을 모시고 싶다. 한국과의 인연을 끊지 않고 한국인들의 지속적인 치첸잇사 방문을 위해 무언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 그의 소박한 소망이다.

5. 앙헬 에레라 김

"나는 한인 후손" 늘 커밍아웃하는 베라크루스 최고급 법의학 전문가

 부산 출신 김발명(金拔明)의 후손. 한인 3세로 그는 멕시코인 안토니오 에레라 아고스따와 한국계 글로리아 김 공의 아들. 43세.
  베라크루스 주 꼬앗사꼬알꼬스 시 검찰청 법의학자로 근무하며 검시 해부 등을 맡고 있다. 낮에는 보건 사무처장, 오후에는 내과 전문의로 외래치료, 밤에는 골포 데 멕시코대학 교수로 강의하는 1인 3역. 그의 하루 일과를 보면 오전 9시에 밤 9시까지 일한다. 그는 또 법률암호학(거짓말 탐지기) 석사 과정을 마쳐 베라크루스 주 전체에 4명밖에 없는 법률암호학자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자신이 한인 후손이라는 사실에 대해 라몬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늘 내가 한인 후손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달리 눈에 띄는 나의 성(김) 때문에 사람들이 먼저 물어 보기도 한다. 그것이 나에게는 또 영광이다. 주변에 나이 많으신 한인 친척 중에는 젊었을 때 한인 혈통이라는 이유로 언어폭력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들었다. 치노 치노...라며 중국인이라고 놀리는 사람들에게 내가 한인 후손임을 밝히면 나를 분명히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한인 후손으로서 나는 어머니의 근면성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한다. 멕시코인 아버지는 변호사로서 늘 옳은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쿠바>>>>

6. 알리시아 데 라 깜빠 박

"내 안에 동양적 신비가 있다." 그림에 담긴 한국인의 혼

  1966년 아바나에서 스페인계 아버지와 한국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알리시아 데 라 깜빠 박(39세). 그녀는 여러 대학에서 미술 강의도 하는 화가다. 산 알레한드로 아카데미에서 예술 활동을 시작했고 고등교수원에서 조형예술 학위를 받았다. 쿠바 국립 예술작가협회(UNEAC) 회원이다. 지금까지 모두 8차례의 개인전을 가졌고 그 외 미국,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일본, 멕시코, 브라질 등에서 열린 기념전이나 합동전에 참가한 것은 허다하다. 회화, 소묘, 일러스트레이션, 조각, 캐리커처 등에서 시각적으로 다양한 표현 양식을 획득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외모적으로도 동서양의 미가 절묘하게 혼합된 알리시아의 매력은 그녀의 작품에서도 신비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녀의 남편 시네시오 후에다라는 “그녀는 인간적으로 좀 신비한 면이 있는데 그런 게 작품에도 있다. 아시아 계통의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적인 측면이 그녀 안에 내포되어 있고 그게 자기도 모르게 표현되는 것 같다.”라며 동료 화가이자 남편으로서의 평가를 내렸다.
  요즘 그녀가 몰두하고 있는 작품은 100년 전 멕시코와 쿠바로 건너 온 조상들에 대한 경의를 표현한 작품. 에네껜이 촘촘이 즐비한 밭 가운데 한복을 입은 그녀의 조부모(혹은 이민자 전체의 대표)가 서있고 하늘에는 태극 형상이 희미하게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의 주제는 노스텔지어다. 어머니 세대의 고통에 대해 공감했기에 경의를 표하는 작품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7. 세실리오 박 김

"저도 한 쿠바음악 합니다" 바라데로의 한인 연주가

   쿠바 아바나 근교의 싼따 만따 바라데로에 살고 있는 세실리오 박 김은 현재 ‘체프 바라데로’라는 식당에서 노래와 연주를 한다. 한인 3세로 올해 나이 일흔 일곱, 그를 포함한 3인조 밴드의 리더다. 순수 한인의 피를 받은 그가 쿠바 음악을 제대로 표현 할 수 있을까?  세실리오는 이런 질문이 기우라는 듯 “나는 한인 혈통이지만 쿠바 태생이고 쿠바 음악을 들으며 자라 그 리듬에 빠져들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의 동료 에우헤니오 기예르모 라미레스 라미레스도 세실리오에 대해 “쿠바인의 음악성을 타고 난 사람”이라며 칭찬하고 앞으로도 계속 함께 음악활동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의 능력을 믿고 발전시키는 노력과, 재능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77 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열정적으로 예술을 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다. 노래를 부르는 와중에도 발장단까지 맞춰가며 들썩일 때는 영낙없는 노익장이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는 쿠바의 전통 음악인 “손(Son)”이다. 한국 노래는 아리랑, 애국가에 노사연의 만남까지는 부르고 연주할 줄 안다. 인터뷰의 말미에 세실리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내가 늘 마음속에 담아왔던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내가 죽기 전에 조상의 조국에 가보고 싶다. 가서 쿠바 음악을 소개하면서 할아버지의 나라를 둘러보고 싶다.” 과연 그의 소망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8. 넬슨 울리세스 임 장

불혹의 나이에 한국을 배우는 경제학 교수

  쿠바 한인중 독립운동가로 한국 정부의 훈장을 받은 임천택, 그리고 그의 아들로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 혁명에 참여한 뒤 차관급인 식품청장을 지낸 헤로니모 임 김. 이 혁혁한 집안의 장남이 바로 넬슨 울리세스 임 장 교수(42세)다. 드물게 순수 한인의 피를 이어받은 넬슨씨는 산띠아고 데 쿠바 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 경제학과 교수로 재임 중이다. 그런 그가 지난해 11월부터 낯선 서울생활을 하고 있다. 한국 재외동포 재단의 지원으로 경희대 국제 교육원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불혹이 넘은 나이에 가족들(부인과 1남 3녀)과 직장을 두고 한국행을 결행하기란 쉽지 않았을 터. 앞으로의 각오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다 좋은데 좀 춥다. 쿠바는 춥지 않으니까.. 하지만 한국의 추위에 대비해서 외투도 준비해왔고 정신적으로도 무장하고 왔다." 자못 비장하다. 100년 전, 보도 듣도 못한 멕시코라는 나라로 떠난 조상들, 거기서 또 다시 더 나은 삶을 위해 쿠바로의 모험을 택한 할아버지, 그리고 말로만 듣던 할아버지의 고향 한국으로 온 넬슨. 도전을 거듭하는 그 가족의 모습에서 에네껜 한인의 원형을 본다. 넬슨 교수는 무엇을 뚜렷이 이루어서 여기 '한인 후손 성공시대'의 대열에 든 것은 아니다. 그의 도전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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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5.02.11 - 17:05
LAST UPDATE: 2005.02.12 -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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