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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정글화 (http://jungpd.co.kr http://jungpd.co.kr)
Subject   왜 멕시코 이민은 한 번으로 끝났는가
방송문화 3월호>>>>

주지하다시피 멕시코 이민은 1905년 한 차례로 끝났다. 이역만리 멕시코로 간 한인들은 을사늑약과 일한병탄의 와중에 고국에서 잊혀진 채 망향과 유랑의 세월을 보냈다. 하와이는 물론, 만주, 일본 등 구한말과 일제하에 진행된 무수한 디아스포라가 있었지만 이렇게 단 한 번으로 끝난 경우는 없다. 왜 멕시코 이민은 단 1회로 끝났는가. 한국인 멕시코 이민 100주년 특집 3부작 에네껜(방송 2월 20일 밤 10시 30분 1부/ 2부, 27일 밤 10시 30분 3부)에서는 바로 여기에 문제의식을 품고 이를 집요하게 추적하였다.
마침내 일본 외무성 외교 사료관에서 당시 비밀문서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이에 따르면 일본은 당시 하와이 한인들의 증가로 인해 일인들이 미국 본토로 유입됨으로써 미국내에 일본인 혐오 여론이 형성되는 것을 우려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를 막고자 대한제국에 압력을 가해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을 금지시켰고 그 와중에 멕시코 이민 또한 중단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결국 여기에는 당시 국권이 실추되던 대한제국의 무능과 이에 앞서 이러한 사태를 자국의 이익에 교묘히 이용한 일본의 음모가 있었다. 또한 일본은 유카탄 지역에 한인들이 집단 이주하자 주멕시코 일본 영사를 동원해 한인들의 동태를 사찰하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1910년 국권 상실 이후에는 한인들을 일본 영사관의 관할 하에 들도록 회유 압박하고, 유카탄 한인들의 강한 배일(排日) 성향이 재미 샌프란시스코 한인 조직이나 임시정부와 연계되지 않도록 예의주시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사실은 그동안 학계에서는 연구자들에 의해 일부 내용이 파악되고 있었으나 2차 인용이 대부분이었다. 일본 외무성 비밀문서의 실체가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현지취재를 통하여 이들 문서를 포착한 곽동국 도쿄 PD 특파원에게 감사드린다.
 
그러면 차근차근 당시의 상황을 들여다 보자. 우선 이 사태는 1902년 이후 한인들의 하와이 이민이 본격화하면서 비롯되었다. 일본은 이를 결코 호의적으로 보지 않았다. 당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한인들은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에 높은 생산성을 보이고 있었다. 또 이들은 파업권에 눈뜬 일본인에 비해 노동충성도가 높았다. 당연히 사탕수수 농장주들의 한인 노동자 선호가 높아질 것은 자명한 일. 하와이에 정착한 일인들은 캘리포니아 등지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한인들의 이주로 인한 여파로 일인들의 미국 본토 유입이 늘어날 조짐을 보였다.
주지하다시피 19세기 중반 이후 미국에서는 이른바 '황화론'이 유포되는 가운데 중국인들에 대한 혐오와 기피 경향이 심했다. 미국으로서는 또 다른 동양계인 일인들의 폭증을 막기 위해 일본인들에 대한 이민 배제법안을 만들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명치유신으로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이루었다고 자부하던 일본으로서는 이는 치욕적인 일이었다. 일본은 이 같은 사태를 초래시킨 한인들의 하와이 이민을 막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미국의 이민사 전문가 웨인 패터슨 교수(위스콘신 노버트대)는 "당시 일본의 외무장관 고무라는 '만약 미국 본토에서 일본인 배제 법안이 통과되면 그동안 일본은 미국, 프랑스와 같다고 생각해 왔는데 중국처럼 낮아진다'며 반대했다. 그래서 미국의 일본인 배제법안을 한사코 막으려 했다. 그 방법은 한인들의 하와이 이민을 막아 일본인들이 캘리포니아로 건너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한편 그러던 중 1905년 한국인의 멕시코 에네껜 농장 이민이 시작되었다. 일본 당국은 최초에는 이것이 한인들의 하와이 이민 추세를 돌려놓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인지 사실상 이를 방치하거나 조장하였다. 한인들의 멕시코 이민 송출 과정에서 일본의 민간 회사인 대륙식민합자회사를 필두로 일본인들이 깊이 개입하였던 것이 이를 입증한다. 멕시코 에네껜 농장에 보낼 동양계 노동력을 구하던 국제적인 이민브로커 마이어스와 일인들이 공모하여 한인 노동자들을 모집한 것이다.
일본의 멕시코 이주는 이미 1897년에 시작됐다. 치아파스 지방의 커피 농장 이민이 바로 그것. 일본은 멕시코의 여러 상황과 조건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열악하기 짝이 없던 유카탄 지역에 일본인이 가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한인들의 에네껜 농장 이민은 그들로서는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한인들을 태운 이민선 일포드호가 출항할 때 한국내 영사 조직을 총동원해 바로 실태 파악에 나섰다. 일본 외무성 문서철에서 당시의 기록들을 찾을 수 있다. 아이러니칼하게 한국인 멕시코 이민에 대한 가장 정확한 자료는 일본의 것으로 학계에서는 정평이 나 있다. 이와 관련 멕시코 국립대 알프레도 로메로 교수는 "당시 일본은 처음부터 한인들을 지속적으로 관찰했다. 그래서 한인들이 몇 명이고, 누구였으며 어떻게 왔는가에 대한 내용은 유일하게 일본의 문서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한국은 물론 멕시코에도 그런 서류가 아예 없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멕시코 에네껜 이민이 하와이 사탕수수 이민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열악하고 가혹한 조건이라는 것이 한국 내에 알려지면서 비판여론이 비등하였다. 그러자 고종은 당시 외무 차관으로 있던 윤치호를 멕시코 현지에 보내 실태 조사를 시키고 대책을 마련하려 하였다. 그러나 때는 바야흐로 을사늑약 직전의 시점. 일본으로서는 대한제국이 독립적으로 어떤 외교적인 문제해결을 도모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와이까지 가 있던 윤치호는 일제의 교묘한 방해(재정고문을 동원, 윤치호의 출장 경비를 승인하지 않는 방식)로 현지 실사에 성공하지 못했다. 일본의 공작 때문이었다.

고종은 더이상의 추가적인 멕시코 이민을 금지함으로써 문제의 봉합을 기도하였다. 멕시코의 한인들을 일괄 귀국시킬 힘은 물론 현지에 영사를 파견할 능력도 없는 대한제국으로서는 그 이상의 조치를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자 이미 대한제국의 모든 상황을 장악하고 있던 일제는 특정국가에만 차별적인 조항을 둘 경우 외교적으로 문제가 생긴다며 압력을 가했다. 결국 대한제국은 차후 이민법이 제정될 때까지 모든 나라에 대한 이민을 금지한다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웨인 패터슨 교수(위스콘신 노버트대)는" 당시 한국 외무부는 일본 정부의 강요로 멕시코뿐 아니라, 하와이 등 모든 해외이주를 중단해야 했다. 일본인들은 아주 영리해서 멕시코 한인이주 사건을 이용해서 한인들의 하와이 이주를 막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로써 1905년 제물포항을 떠나 멕시코 유카탄으로 떠난 1,033명의 한인들은 고스란히 '잊혀지고 버려진 존재'가 되고 말았다. 연락은 사실상 두절되었다. 하와이 사탕수수농장과 같은 사진결혼도 가능하지 않았다. 1910년 일한병탄 이후에는 그들에게 조국은 없었다. 멕시코 정부는 대한제국 또는 조선 국적을 인정하지 않았다. 생존과 적응, 족내결혼을 통한 민족 정체성 유지와 먹고 사는 문제가 모두 그들 스스로의 손에 달렸던 것이다. 유카탄 메리다 지방의 한인들은 1909년 계약기간 종료 후 비록 경제적으로는 열악했으나 대부분 자유로운 신분을 획득하였다. 한인들은 자생적으로 국민회를 결성하는 등 드높은 단결력을 보이고 있었다. 두레, 향약의 전통으로 상당한 수준의 자치도 실현하고 있었다. 몰락한 관리, 양반 출신에 구한말 퇴역 군인 출신이 200명을 상회하는 이러한 한인 집단의 동태는 일본으로서는 경계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천 여 명이 넘는 한인들이 있는 상황부터가 불편했던 모양이다. 나라 잃은 백성의 설움이 어디로 가겠는가. 당시 일본은 멕시코와 외교관계가 있었다. 현지의 영사를 동원하여 재유카탄 한인들의 동태를 사찰하고 감시하였다. 주5) 일본으로서는 이들이 재미 샌프란시스코 한인 조직이나 임시정부와 연계되거나 혹은 무장하여 항일 활동을 할 것을 우려하여 예방적인 감시를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한인들의 민족성과 반일 의식은 대단했다. 특히 이들은 1910년 일한병탄 이전에 멕시코로 갔기 때문에 망국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1919년 3.1운동 소식이 전해졌을 때는 이를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았다.
일본 외무성 자료에 따르면 일본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왕성해 무엇보다 일인 영사가 내방한 것에 대해 시찰을 방해하거나 아예 조사를 할 수 없게 하였다고 한다. 정세보고서에는 또 "한인들은 격앙되어 '한국인은 일본 관헌에게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으니 속히 이 경작지를 떠나라'고 말했다. 초촙 농장에서는 이근영이라는 한국인 지도자가 '이 경작지에서 한국 이민자는 일본 관리의 어떠한 보호도 필요 없다'며 덤빌 기세였고 그들은 노동자용 도끼와 낫을 휴대하고 있어 상황이 대단히 험악하게 되어 본관은 경작지를 벗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인 멕시코 이민사>를 집필한 이자경 여사(재미 작가)는 이에 대하여 "멕시코 이민은 사실상 기민(棄民)이자 유민(流民)으로서 지구의 가장 끝까지 간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항일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엄청나게 뜨거웠다. 임시 정부를 위해서 얼마 안 되는 수입중에서 거의 1/10 이상 헌금을 했다. 학교를 세워 무학자와 아동들에게 국어를 가르쳤고 태극기도 가르쳤다. 조국을 향해서 돌이라도 던질 수 있는 버림받은 집단이었지만 그들의 조국에 대한 사랑은 끝이 없었다."고 한인들의 면모를 소개하였다.

한편 한인들은 2차대전 발발 후에는 멕시코 정부가 한인들을 일인으로 간주하여 적대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에 적극 대응하기도 했다(당시 멕시코는 연합국의 일원). 멕시코 일부 지방에서는 추축국 즉 일본, 독일, 이태리 국민들을 별도 지역에 소개(疎開), 집단수용할 때 일본인 취급을 받고 고초를 치른 한인들도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이처럼 100년전 에네껜 이민 한인들을 둘러싼 한반도와 유카탄 반도의 상황을 보면 흥미로운 점과 역사적 교훈이 한둘이 아니다. 새로운 사실과 충격적인 내용을 담은 한국인 멕시코 특집 <에네껜>은 은 2월 20일, 27일 3부작으로 연속 방영된다. 그러나 방송은 논문이 아니다. 학문적으로는 매우 중요하지만 대부분 문서와 인터뷰로 구성된 이들 내용을 프로그램에 소상히 담을 길이 없었다. 나는 3부작의 프로그램 중 제2부 '백년의 유랑'편에 이 부분을 대폭 압축해 편집했다. 그리고 저간의 사정을 별도의 기록으로 남겨 뜻있는 시청자와 공유하고자 한다. 미국 위스컨신 노버트대 웨인 패터슨 교수, 멕시코 국립대 알프레도 로메로 교수, 재미 이자경 작가, 재 멕시코 조남환 목사 등 현지에서 이 문제를 확인해 주고 성원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일본의 기무라 겐지 교수도 빠뜨릴 수 없겠다. 그는 "당시 유카탄 한인들이 일본의 영사의 '보호'를 거부하는 바람에 이후 그들의 상황은 더 나빠졌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는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의 징후가 다분하다. 참으로 일본인다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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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5.02.12 - 08:13
LAST UPDATE: 2005.02.12 -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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