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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정글화 (http://jungpd.co.kr http://jungpd.co.kr)
Subject   ☞ <MBC가이드> 선정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베스트  10
잊어서는 안될, 잊혀질 뻔한 이야기들

<이제는 말할 수있다> 100편은 주제별로 보자면 ‘레드 콤플렉스’ ‘인권 문제’ ‘한미관계’ ‘친일청산과 민족 문제’ ‘분단과 북한 문제’ ‘한국전쟁’ 등으로 압축된다. 우리 역사에 대한 고민과 성찰로 치열하게 한 편 한 편을 탄생시킨 PD들의 열정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다. <MBC가이드>는 그동안 방송된 100편 가운데서도 성과와 반향이 컸던 작품 10편을 선정, 소개한다.

-------------<MBC가이드> 선정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베스트  10------------
 
1. 실미도 특수부대(김동철 연출)
...영화 <실미도>의 오리지널판. 영화 <실미도>는 이 프로그램에 빚졌다
2. 보도연맹 2부작(이채훈 연출)
...경산 코발트 광산을 직접 발굴해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고자 했던 제작진의 투혼
3. 친일파 3부작(정길화 연출)
...잘못 끼워진 첫단추…. 역사의 정기를 바로잡으려는 집요한 연작 시리즈
4. 비밀결사-백의사(한홍석 연출)
...해방 공간의 비극적 틈새를 들여다본 ‘누아르 다큐멘터리’
5. 91년 5월 죽음의 배후(홍상운 연출)
...철저한 추적 끝에 유서대필 사건의 진실은 드러나고…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시금석이 된 프로그램
6. 북파공작원 2부작(이규정 연출)
...남북분단이 빚은 모순의 또 다른 모습, 오늘의 한국인은 누구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7. 삼청교육대 2부작(채환규 연출)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덮을 수 없는 역사의 교훈, 군부독재의 망령, 버림 받은 희생
8. 한국전쟁과 포로 3부작(김환균 연출)
...높은 완성도와 분단 극복을 위한 짙은 휴머니즘
9. 10.26 궁정동 사람들(장형원 연출)
...영화 <그때 그사람들>을 능가하는 힘. 최고 시청률의 힘
10. 끝나지 않은 비밀 프로젝트, 일본의 원폭 개발(박건식 연출)
...일본의 원폭 개발을 둘러싼 뿌리 깊은 내막 최초 공개          

(*방송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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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특수부대’ 김동철
‘익명의 섬’에서 역사의 전면으로
1999년, 전국에 퍼져 있는 실미도 특수부대원들과의 취재 과정에서 아직도 마음속에 앙금으로 남아 있어서인지 “당신! 술 할 줄 아나?”가 대부분 취재원들의 첫인사였다. 특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경북 의성에 사는 사고 당시 소대장(김O태 씨)과의 취재 및 인터뷰를 허락 받기 위해 대낮부터 새벽까지 마라톤 술 대결 끝에 다음 날 아침 7시에 얻어 낸 인터뷰 승낙이었다. (당시 인터뷰 영상을 보면 소대장의 몸이 좌우로 계속 움직이고 있다. 물론 카메라 밖의 본인도 움직였겠지만. 이 분이 훗날 영화 <실미도>에서 허준호가 맡은 소대장 역의 실제 인물이다.)
방송이 나간 후 ‘실미도 사건’에 대해 세간에 널리 알려졌고, 공전의 히트를 친 영화 <실미도>의 제작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30년 넘게 ‘익명의 섬’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 있었던 ‘실미도 사건’이 세상에 공론화돼 북파공작원들의 실체와 그들의 죽음에 대한 국가의 방기를 고발, 실미도의 실체를 밝히게 된 데 일조를 한 점은 이 프로그램의 큰 성과라 할 수 있겠다.

‘보도연맹’ 2부작’ 이채훈  
잊혀질 뻔했던 ‘또 다른 양민 학살’
여순사건을 취재하다가 ‘보도연맹사건’의 전말을 처음 들었다. 여순사건 때보다 전쟁 발발 직후 ‘보도연맹 사건’으로 양민들이 더 많이 죽었다는 이야기였다. 후퇴하던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전국에서 수십만 명이 학살됐다는 믿기지 않는 사건인데, 나이 마흔이 되어서야 처음 듣다니! 너무나 혹독하게 당했기 때문에 아무도 입에 올릴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아이템은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가장 ‘전형적’인 내용이었다.
3천여 명의 보도연맹원이 매장됐다는 경산 코발트 광산을 발굴한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시청 관계자, 광산 전문가, 유전자 감식팀, 고고학팀을 모아서 팀을 꾸리고 발굴 계획을 세우는 동안 몇 번이나 발굴 현장이 꿈에 나타났다. 수평갱 입구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고 들어가는 순간 등으로 식은땀이 흐르던 게 기억난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적지 않은 국민들이 이 사건을 알게 된 건 다행이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언급돼 이제는 ‘보도연맹 사건’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자칫하면 아무도 이야기 하지 않은 채 영원히 잊혀질 뻔한 사건이었다.
한편 우리 사회의 권력은 여전히 ‘무책임의 구조’하에 던져져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이 프로그램으로 ‘보도연맹 사건’을 정부가 인지했을 게 분명한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피해 유족들의 절규는 다시 침묵 속에 가라앉고 말았다.

‘친일파 3부작’ 정길화
친일청산과 냉소주의
그동안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책임프로듀서로 통산 마흔세 편의 프로그램을 기획했고, 여덟 편을 직접 연출했다. 그 여덟 편 중 세 편이 친일잔재 청산에 관한 것이었고, 두 편은 언론 관련, 그리고 나머지 세 편은 연좌제, 북핵 위기 등 분단구조와 그 유산에 관한 것이다.
3년에 걸쳐 친일파 관련 아이템을 세 편이나 제작한 것은 2001년에 연출한 ‘반민특위’ 편의 일정한 성과에 기인한다. 연로한 반민특위 관련자들이 세상을 뜨기 전에 증언을 담아둬야겠다고 시작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증언한 분 중에서 방송 이후에 많이 돌아가셨다.)
 ‘반민특위’ 편은 통산 5방의 기록을 세웠다. ‘친일경찰 노덕술’과 ‘만주의 친일파’도 두 번씩 방영됐다. 그러면 뭐하나. 친일파들이 득세하고 독립운동의 후예들이 몰락해 있는 우리 사회의 이 가치전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 ‘친일진상규명위원회’의 발족은 위안이 된다. 하지만 연좌제도, 소급제도 안되니 냉소주의만 불러올 뿐이다. 현실에서는 이미 늦었고 이제 역사와 다큐멘터리의 영역으로만 남았다. 2001년에 방송된 ‘반민특위’ 편 말미에 너무 짧게 다룬 반민특위 조사관 김철호 선생의 의문스러운 죽음을 추적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것이 PD로서 나의 꿈이자 숙제다.

비밀결사 백의사 한홍석
‘백의사, 한 장의 사진만 들고…’
2001년 가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김구 암살’의 새로운 배후로 극우 테러 단체인 ‘백의사’를 지목하면서 그 ‘수괴’였던 염동진은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그러나 국편위에서 공개한 자료는 20대에 찍힌 염동진 사진 한 장, 그리고 CIC(미군방첩대)의 첩보 보고서 몇 페이지뿐이었다. 그러나 해방 정국에서 백색 테러의 중심인물이었던 이 ‘극우 테러리스트’는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이보다 몇 년 전인 1998년 해방 정국을 다른 다큐멘터리 <점령군 사령관, 하지>를 제작한 바 있는데, ‘염동진’이라는 인물을 접하면서 또 다른 각도에서 해방 정국을 조명하고 싶다는 욕구가 새롭게 솟았다. 해방 정국이 사실상 오늘날 한반도가 안고 있는 남북 문제, 국제 문제, 이념 갈등의 기원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돌이켜 보면 2000년부터 2003년까지 4년에 걸쳐 여덟 편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제작하면서 PD 인생의 상당 부분을 흘려 보냈다. 한 편 한 편이 다 사람의 ‘진을 빼는’ 작업이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편이다. 때묻지 않은 순수한 열정으로 제작에 임했던 당시의 아스라한 추억 때문일 것이다.

91년 5월, 죽음의 배후 홍상운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
지난 5월 6일, 여야 국회의원 113명이 이른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과거사위 조사대상에 포함시킬 것을 촉구했다. 이른바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 불리며 공안정국을 조성하려는 정권의 조작극이라는 논란을 낳았던 유서대필 사건. 진실이 이제는 밝혀질 수 있을 것인가?
3년 전, <이제는 말할 수 있다-91년 5월, 죽음의 배후>는 이 사건의 의혹들을 낱낱이 추적, 당시 재판 결과를 완전히 뒤집을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들을 밝힌 바 있다. 사건 당시 재판의 유일한 증거로 채택된 국과수의 필적 감정의 문제점을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저명 감정인들의 철저한 분석을 통해 반박했다. 또, 당시 유서의 글씨가 아들의 것이 아니라는 증언으로 사건 판결에 크게 영향을 미쳤던 고(故) 김기설 씨 아버지로부터도 그것이 사실이 아니었다는 힘겨운 고백을 얻어낼 수 있었다.
당시 취재진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오히려 사건 당사자인 강기훈 씨였다. 검찰과 정부, 언론과 국민 모두에 대한 불신과 실망감에 빠져 있던 그를 카메라 앞으로 내세우기까지는 수차례의 설득과 호소, 간청까지 해야 했다. 그런데 최근 유서대필 사건에 대한 과거사위를 통한 재조사 논의가 시작될 무렵, 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취재 당시 수집한 자료와 증거들을 얻고 싶다며 국회의원들에게 당시 취재 내용을 브리핑해줄 것을 요청하기까지 했다. 일정이 맞지 않아 끝내 그 요청에는 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프로그램 제작 2년 만에 값진 보람 하나를 더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진실과 정의에 대한 깊은 회의와 불신 속에 살아가던 강지훈 씨가 이제는 그 그늘을 벗어나고 있구나 하는 확신을 얻게 된 것이다.

‘북파공작원’ 2부작 이규정
‘우리는 조국을 버리지 않았다!’
처음 취재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회로 복귀한 이후 국가로부터 평생 감시와 사회부적응으로 인한 생활고, 가정파탄, 심지어 정신질환자로 평생을 살아가야 했다. 이런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은 당시 국가와의 약속으로 아직도 자신의 과거 행적을 말하는 것이 큰 죄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잘못 말하면 자신과 가족들이 큰 해를 입는다고 믿고 있었다. 결국 깊은 신뢰와 믿음을 준 후에야 비로소 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만난 사람은 어림잡아 2백 명이 넘는 것 같다. 그중 몇몇 사람의 사연은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끔찍했다. 이러한 북파공작원들의 가슴에 사무친 절규의 소리를 듣고 나면 서글픈 현실 속에서 PD로서 의무와 언론의 참 역할을 새삼 느낄 수 있는 것 같았다. 이제는 그늘 속에서 외면됐던 북파공작원들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줬다는 (북파공작원의 명예회복과 보상에 관한 법의 통과)자위를 해 보기도 한다.
방송이 나간 후 시청자들의 관심과 격려는 본인에게 큰 힘이 되었다. 앞으로 더 좋은 프로그램으로 시청자를 만날 수 있다는 용기를 얻은 것이다. 그리고 내 평생 영원히 잊지 못할 한 북파공작원의 말을 마음속에 새기며, 본인은 조국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를 자문해 본다.
“조국이 우리를 버렸을지라도 우리는 조국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삼청교육대’ 2부작 채환규
분노와 울분으로서의 사회사
최근 여러 화제를 낳고 있는 드라마 <제5공화국>의 방송과 더불어 일고 있는 ‘전두환 신드롬’을 보면서, 본인의 눈에는 유난히 크게 띄는 대목 하나가 잡힌다. 그것은 전사모 카페 이야기도, 이덕화 씨의 폼 나는 연기도 아니다. 바로 논란의 기사들 댓글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한 표현이다. 그게 뭐냐고? 바로 전 씨가 저지른 ‘삼청교육대’의 찬양 내지는 부활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거론하는 글들이다. 혹독했던 그 시절의 흉포성을 떠올리며 순간 무섬증이 인다. 실제로 우린 무슨 큰 폭력사건이 터질 때마다 ‘삼청교육대 또 한번 안 하나’ 하는 말을 아무런 느낌 없이 내뱉고 있지는 않았던가?
3년 전 첫 방송 후 게시판에 올랐던 수 백 건의 분노와 울분과 동정의 글들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나이 쉰을 넘긴 남자들의 그 서럽고 억울한 눈물들을 그 어디서 본적이 있던가?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그들을 위해 우리 사회 어느 누구도 나서주지 않는 현실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 방송을 통해서 제기했던 잔혹한 인권유린 행위와 은폐된 사망자 수와 원인, 그리고 숱한 무고한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의 고통과 피해.
‘삼청교육대’ 문제야말로 해방 공간의 대규모 양민학살 사태 이후 광주항쟁과 함께 미증유의 인간파괴행위일 것이다.
‘삼청교육대’ 문제와 관련해 지난해 주목할 만한 일이 하나 있긴 있었다. ‘삼청교육대피해자보상법안’이 국회를 통과해 정부에서 피해자들의 사례를 받았다. 신고한 피해자들에게는 얼마간의 보상금이 주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돼서는 절대 안된다. 현 정부가 벌이고 있는 ‘과거사 진상규명’의 최후 과제는 ‘삼청교육대’에 대한 진상규명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만났던 수백 명의 얼굴이 다시금 떠오른다. 앞으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얼굴들일 것이다. 본인의 연출 인생에서 육체적으로 가장 지치고 가장 많은 눈물을 삼키게 했던 취재원들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죄송하고, 미안할 따름이다. 두세 번씩 방송하면서도 그 분들께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했으니 말이다.

‘한국전쟁과 포로’ 3부작 김환균
이데올로기에서 다시 인간으로
‘한국전쟁과 포로’ 3부작은 내 연출 이력에서 전환점이다. 그동안 해왔던 프로그램에서 내가 지향하고자 한 것은 ‘싸구려 휴머니즘’의 배제였다. 차가운 팩트들로 하여금 말하게 하라. 이데올로기들이 항용 ‘싸구려 휴머니즘’을 통해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 대한 반발이었다.
나는 ‘한국전쟁과 포로’에서 다시 인간으로 돌아왔다.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은 인간이라는 이유에서다.
전쟁은 늘 인간에게서 체온과 피와 살을 제거해 버린다. 그의 심장에 콸콸대는 추억도 빼앗아가 버린다. 싸늘한 전쟁 기계, 이데올로기의 전사…. 전쟁은 쿨한 존재들을 만들어 낸다. 그것이 50년 넘게 한반도를 지배해 온 이데올로기의 비밀이다. 이데올로기에서 다시 인간으로. 그것이 내가 이 프로그램에서 이루고자 한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수용소에 갇힌 후로 한 번도 석방되지 못한, 아니면 풀려나서도 여전히 포로일 수밖에 없는 그들을 풀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은 잘 모른다. 그들이 정말로 풀려났는지. 그들이 새처럼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긴 세월의 반성이 필요한 것인지.

‘10.26, 궁정동 사람들’ 장형원
‘그때 그 사람들’의 전락
사람의 눈은 참 오묘하다. 10.26사건을 취재하면서 새삼 ‘사람의 눈’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이제는 모든 아이템이 그러하듯이, 당시 궁정동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을 직접 만나는 것은 어려웠다. 20여 명의 관련자들을 만났지만, 정작 인터뷰에 응해 준 사람은 단 세 분.(대부분 몰래 녹취를 했지만 말이다)
묘하게도 그 세 분이 인터뷰를 해주실 때 그들의 눈은 말로 형용하기 힘든 그런 눈이었다. 79년 10월 26일 그 장소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이제는 추락해 보잘것없어져 버린 사람들…. 본인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아직도 제대로 말할 수 없는 처지. 입은 말할 수 없지만 그들의 눈은 내게 이야기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눈이 이야기하는 내용을 다 알 수는 없었지만, 그 분위기를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지난해에 이어 10.26사건을 좀더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4년 뒤 10.26 30주년에는 그분들의 눈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속 시원히 들어보고 싶다. 어려운 이야기를 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일본의 원자폭탄개발 프로젝트’ 박건식
참기 어려운 제국주의의 부활
2차 대전 때 일본이 원폭개발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사에 착수한 것은 2001년이었다. 그리고 스즈키 다쓰사부로라는 원폭개발 책임자가 생존해있는 것을 알아냈다. 당시 89세인 스즈키 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돌아온 것은 “왜 한국에서 이러한 내용을 취재하느냐. 아직 말할 수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그리고 스즈키 씨는 섭외한 지 한 달여 만에 숨을 거뒀다. 이로써 2차 대전 때의 일본 원폭개발 취재는 미궁에 빠져버렸다. 그리고 4년이 흐른 2005년 현재.
이제는 접근법을 조금 달리했다. 올해가 아인슈타인 서거 50주년, 상대성이론 발표 100주년이라는 점에 착안해 과학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며 접근했다. 일단 만나야 인터뷰를 하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닌가. 결국 2차 대전 중에 극비로 개발된 일본의 원폭개발의 비밀은 아인슈타인이 풀어준 셈이었다. 취재 도중 일본의 원폭개발은 2차 대전에 국한되지 않고 전후에도 계속 핵무장 시도로 이어져왔음이 드러났다. 그리고 전후 원폭연구개발 주역은 2차 대전 때의 원폭개발 과학자들이었다는 점도 밝혀냈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인가? 올해는 가스라-테프트 조약으로 일본이 조선을 사실상 지배한 을사조약 100주년이 되는 해이고,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일본이 패전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다. 과거의 비극이 반복되지 않게 하려면, 아시아인들이 단결해 아시아에 핵무기가 자리 잡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이 그러한 평화운동에 조그만 디딤돌이 될 수 있다면 더없는 영광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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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5.10.11 - 14:03
LAST UPDATE: 2006.06.06 -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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