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이름검색

        HOME  

  Profile Photo 글마당 토론실 中國硏究 각종활동 게시판 자료실 사이버강의실

 Profile

 Photo

 글마당

 정길화칼럼

 취재제작기

언론비평 

 미셀러니

     토론실

 언론개혁

 현대사비평

中國硏究

 베이징통신

 중국이슈

 중국자료창

 포토차이나

각종활동

 방송노조활동

 PD연합회활동

자료실

클리핑뉴스

제작팀자료실

개인자료실

 시판

자유게시판

 방명록

  사이버강의실

 

 

41 12 통계카운터 보기   회원 가입 회원 로그인 관리자 접속 --+
Name   정글화 (http://jungpd.co.kr http://jungpd.co.kr)
Subject   기록의 힘, 증언의 힘



기록의 힘, 증언의 힘

“최초의 보도연맹원 처형은 한국전쟁 발발 사흘 만에 강원도 횡성에서 이뤄졌다.”
“보도연맹원 소집은 각 경찰서별로 이뤄졌고, CIC(방첩대)가 보도연맹원 심사를 해 처형과 석방을 결정했다.”
"보도연맹원으로 끌려가 죽은 사람들 중에는 아주 순박하고 어진 평범한 시민과 농민들이 많았다. 하지만 국가명령에 따라 처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관련 기사 발췌 인용)

너무도 생생한 육성 증언이다. 지난 7월 4일 6.25 당시 6사단 헌병대 소속이었던 김만식씨(81)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충북대책위원회에서 주최한 ‘보도연맹원 학살사건 가해집단에 관한 기자회견’에서 직접 밝힌 내용이다. 김씨의 진술은 보도연맹원 처형과정에 직접 참여한 헌병대 초급간부의 첫 증언이다.

그는 1950년 7월 대구 다부동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전력은 증언의 신뢰성과 동기의 진정성 측면에서 상당한 가치를 확보해 준다. 최소한 색깔론 시비는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보도연맹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팠다”며, “인권 회복 차원에서라도 무고한 사람들의 한을 풀어 주는 거름이 되는 마음으로 얘기를 꺼내기로 했다”고 말했다고 한다(한겨레 기사). 김씨의 용기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한국전쟁 중 최대 비극 중의 하나로 꼽히는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은 2001년 MBC 이채훈 피디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보도연맹 2부작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진 바 있다. 담당 피디의 집요한 문제의식과 천착을 통해 실체적 진실에 거의 접근했었다. 여러 주요 증언과 기록들을 어렵사리 확보, 최초로 공개했던 것이다. 이러한 증거들은 권력의 최상층이 명령하고 결정했음을 자명하게 하였다. 김만식씨는 처형집행을 맡은 입장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생생하게 증언함으로써 사실관계의 확인에 있어 종지부(終止符)를 찍고 있다.

문득 2001년의 일이 생각난다. 나로서는 뼈아픈 기억이다. 이채훈 피디가 보도연맹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을 때, 나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반민특위 - 승자와 패자’편을 준비하고 있었다. 반민특위를 취재하려면 당시 이승만 정권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생존 증언자를 수소문하던 중 찾은 이가 장석윤씨(당시 97세)다. 그는 해방 전 OSS(CIA의 전신) 대원으로 활동하다가 미군정기에 고문관을 거쳐 이승만 정권하에서는 제7대 내무부장관(1952. 01- 05)을 역임했다. 다행히 섭외가 이루어져 인터뷰를 약속받았다.

그런데 이 장석윤씨가 1950년 6월 당시에 내무부 치안국장으로 있었다는 것이다.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한 당일 오후 이승만 대통령의 주재로 국무회의가 열렸고, 그 직후 내려진 ‘요시찰인 단속 및 형무소 엄중 경비’건과 6월 28일의 ‘보도연맹원 예비검속’ 명령이 치안국장의 명의로 발송됐다. 바로 장석윤씨다. 이런 사정을 파악하고 있던 이채훈 피디는 섭외가 여의치 않자 내게 부탁을 해왔다. 보도연맹에 대해서도 질문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인터뷰 막바지에) “하나만 더 여쭈어 볼 게 있는데요... 6.25 때 치안국장으로 계시면서 그 저 뭡니까. 보도연맹원에 대한 예비검속을 지시하지 않았나요?”
“그건 나는 모르겠는데....”
"여기 당시의 명령서가 있습니다만....”
“뭐 글쎄 누가 사인한 건지는 모르시지?”
“여기 치안국장으로 돼 있습니다...”
“그거를 특별히 누가 했는지 모르지만 공산당은 요시찰인이니까.... 좌익은 전부(요시찰인이)니까...”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습니까? 생각나시는 거 없습니까?...”
“생각나는 거 없는데... 글쎄 난 그거 기억을 못하는데...”(괄호안은 필자의 보충)

재구성해본 인터뷰 상황이다. 고백하건대 인터뷰는 실패했다. 1904년 갑진생인 장석윤씨의 당시 나이는 97세, 우리 나이로 98세다. 거동과 언사가 자유롭지 않은 노인을 상대로 인터뷰를 진행하기에는 용이하지 않았다. 보도연맹 대목에 이르러서는 아예 입을 닫고 있는 그를 망연히 바라보다가 철수한 기억이 선연하다. 이채훈 피디는 ‘기억이 안 난다’는 대목을 방송하며, 특종을 놓쳤다고 아쉬워했다.

이 때가 책임있는 위치에 있던 이로부터 직접 증언을 들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안 되면 다음에 한 번 더 오겠다는 심정이었는데 오산이었다.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이듬해에 또한번 인터뷰를 요청하였으나 그는 사람을 시켜 거부하였다. 장 전 장관은 그로부터 1- 2년 뒤엔가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해방 전에 한국 구미위원부에서 임시정부 연락관 역할을 맡기도 한 인물이었다. 이승만 정권하 주요 직책중에서는 드물게 독립운동의 전력을 가진 이다. 심전(心田)이 움직였다면 진솔한 토로를 해줄지 모를 일이었다. 그의 ‘선택적 기억력’이 회복되기를 끈질기게 기다리고 인내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증언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가장 큰 적은 세월이다. 시간은 흐르고, 사람에게는 영생이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낮게 추정해도 최소 10여 만 명을 처형했던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 반세기가 넘도록 그 진상과 전모는 다 드러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왜 이런 일이 자행되어야 했는지 동기와 목적이다. 당시의 위정자들은 군사적인 관점에서 용공 이적성(利敵性)이 있는 요시찰인을 예방적으로 처형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야만과 폭력의 시대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 시대의 모순과 한계를 응시하며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후대에게 주어진 과제다. 그 토대는 말할 것도 없이 기록과 증언이다. 상부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면 그대로, 소신과 확신에 의한 것이었다면 역시 그대로.... 그런 점에서 이번 김만식씨의 증언은 참으로 소중하다.

새삼스럽게 절감하는 것은 사실의 위력과 진실의 파괴력이다. 그리고 “천망(天網)은 회회(恢恢)하나 소이불루(疎而不漏)”라는 오래된 금언을 떠올린다. 이 말은 <노자>에 나오는 말로 “하늘의 그물은 넓고 커서 성긴 듯해 보이지만 놓치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모든 사람에게 진실을 영원히 감출 수는 없다.

이 시대 ‘하늘의 그물’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그것은 전파인 것만 같다. 전파는 천망(天網)의 메타포로 그럴싸하다. 하늘의 그물을 물리적으로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전파 곧 방송이기 때문이다. 방송은 천망 즉 하늘의 그물로서 오로지 진실의 포획망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어딘가에 있을 또다른 김만식씨를 찾아내야 한다.

그 일은 아무래도 이 땅의 방송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주요 생존 증언자에 대한 구술사(oral history)를 채록하고 분류해 놓아야 한다. 어떤 경우는 사후 공개를 조건으로 기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녕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역사의 단초는 기록에서 출발한다. 후대의 사가들은 여기서 큰 힘을 얻을 것이다. 지금 누가 그 일을 하고 있는가.



전문은

http://blog.imbc.com/blog.menu.bbs.read.screen?p_club_id=jungle&p_menu_id=21&message_id=48748

참조

게시물을 이메일로 보내기 프린트출력을 위한 화면보기
DATE: 2007.07.22 - 13:08

 다음글 <우리들의 현대침묵사> 머리말
글남기기삭제하기수정하기답변달기전체 목록 보기

                                Copyright © JUNDPD.CO.KR All rights reserved